-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원천리 171-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東學農民革命 國家有功者 韓達文 先生 記念碑(동학농민혁명 국가유공자 한달문 선생 기념비)
東學農民革命 國家有功者 韓達文 先生 記念碑(동학농민혁명 국가유공자 한달문 선생 기념비)
*. 한 달문(휘: 영우, 자: 치화, 호: 묵헌) 선생 약력
- 1859년 6월 2일 도장면 동두산 생 - 1886년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 -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 1895년 4월 1일 졸 - 1998년 5월 동학농민혁명 국가 유공자
동학 농민 혁명군 대장 한달문은 1859년(철종 기미년) 6월 2일 도장면 동두산(현 도암면 원천리 동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영민한 선생은 기개 또한 웅장하여 상대를 압도하는 남다른 면모를 보였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무에를 연마하여 27세 되던 해인 1886년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의 무관으로서 최고위급 관직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였다. 벼슬을 하던 차 당시 안으로는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 관료들의 권력다툼으로 날이 새고 탐욕스런 벼슬아치들은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짜는데 여념이 없었으며 밖으로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강대국들과 일본은 우리나라를 차지하기위해 호시탐탐 침략의 마수를 뻗쳐오는 절박한 상황에서 선생은 사회개혁과 새로운 세상 건설을 추구하며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고 탐관오리처단과 반봉건 반외세투쟁으로 나가고 있던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선생은 뜻을 같이하는 장정들과 함께 1894년 9월 14일 전라북도 삼례 봉기에 참여하여 동학농민 혁명군 대장이 되었으며 그후 주로 나주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12월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현 전남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에서 농민군과 민보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선생을 비롯한 27명이 사로잡혀 강도수, 정사심, 이화삼 등 14명은 총살되었고 한달문, 주심언 등 13명은 나주에 주둔한 관군 진영에 압송되어 모진 문초를 받았다. 당시 관에서 절충장군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했던 선생이 농민군에 가담한 죄는 결코 가벼울 수 없었고 그로인해 선생이 겪은 갖은 악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주옥에서 관군 진영에 잘 아는 이가 있어 목숨을 구할 방도가 있으니 돈 300냥과 의복을 지어 보내달라는 편지를 선생의 모친(도장면 동주산 쌍동댁)에게 보낸 것으로 보아 나주옥에서 겪은 갖은 고초와 처절하고 절박한 심정, 당시의 부패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선생은 나주옥에서 겪은 갖은 고초 등으로 장독에 의해 1895년 4월 1일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동두산에서 살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던 차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 갑오년 납월(1894년 12월)에 선생께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공개하면서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98년 5월 동학농민혁명 국가 유공자로 지정되어 이를 기념하여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2011년 4월 17일 한승구 글
*. 한 달문(휘: 영우, 자: 치화, 호: 묵헌) 선생 약력
- 1859년 6월 2일 도장면 동두산 생 - 1886년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 -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 1895년 4월 1일 졸 - 1998년 5월 동학농민혁명 국가 유공자
동학 농민 혁명군 대장 한달문은 1859년(철종 기미년) 6월 2일 도장면 동두산(현 도암면 원천리 동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영민한 선생은 기개 또한 웅장하여 상대를 압도하는 남다른 면모를 보였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무에를 연마하여 27세 되던 해인 1886년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의 무관으로서 최고위급 관직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였다. 벼슬을 하던 차 당시 안으로는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 관료들의 권력다툼으로 날이 새고 탐욕스런 벼슬아치들은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짜는데 여념이 없었으며 밖으로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강대국들과 일본은 우리나라를 차지하기위해 호시탐탐 침략의 마수를 뻗쳐오는 절박한 상황에서 선생은 사회개혁과 새로운 세상 건설을 추구하며 보국안민의 깃발을 들고 탐관오리처단과 반봉건 반외세투쟁으로 나가고 있던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선생은 뜻을 같이하는 장정들과 함께 1894년 9월 14일 전라북도 삼례 봉기에 참여하여 동학농민 혁명군 대장이 되었으며 그후 주로 나주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12월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현 전남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에서 농민군과 민보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선생을 비롯한 27명이 사로잡혀 강도수, 정사심, 이화삼 등 14명은 총살되었고 한달문, 주심언 등 13명은 나주에 주둔한 관군 진영에 압송되어 모진 문초를 받았다. 당시 관에서 절충장군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했던 선생이 농민군에 가담한 죄는 결코 가벼울 수 없었고 그로인해 선생이 겪은 갖은 악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주옥에서 관군 진영에 잘 아는 이가 있어 목숨을 구할 방도가 있으니 돈 300냥과 의복을 지어 보내달라는 편지를 선생의 모친(도장면 동주산 쌍동댁)에게 보낸 것으로 보아 나주옥에서 겪은 갖은 고초와 처절하고 절박한 심정, 당시의 부패한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선생은 나주옥에서 겪은 갖은 고초 등으로 장독에 의해 1895년 4월 1일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동두산에서 살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고 있던 차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 갑오년 납월(1894년 12월)에 선생께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공개하면서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98년 5월 동학농민혁명 국가 유공자로 지정되어 이를 기념하여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이 비를 세운다.
2011년 4월 17일 한승구 글
獄中書翰(옥중서한) -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1호
도장면 동두산 쌍동댁 어머님께 올리나이다
제번하고 모자 이별 후로 소식이 서로 막혀 막막하였습니다. 남북으로 가셨으니 죽은 줄만 알고 소식이 없어 답답하엿습니다. 처음에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에서 죽을 고생하다가 한 사람읆 나나서 소자의 토시로 신표를 하여 보내어 어머님 함께 오시길 기다렸더니, 12월 20일 소식도 모르고 이날 나주옥으로 오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으니 우선 굶어 죽게되니 어찌 원통치 아니 하리요. 돈 300여량이 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주시오. 그간 집안 유고를 몰라 기록하니 어머님 몸에 혹 유고 계시거든 옆사람이라도 와야 하겠습니다. 부디부디 명심 불망 하옵고 즉시 오시기를 차망 복망하옵니다. 남은 말씀 무수하니 서로 만나 말 하옵기로 그만 그치나이다.
1894년 12월 28일 달문 상서 / 의복 상하벌, 보신한벌, 토시한벌, 주의한벌, 망건, 노자 2량. 온 사람과 함께 가 과세를 편히 할터이니 혹 가고가 잇어 못오면 옥동 가고골 한기수에게 의복지어 보내소서.
도장면 동두산 쌍동댁 어머님께 올리나이다
제번하고 모자 이별 후로 소식이 서로 막혀 막막하였습니다. 남북으로 가셨으니 죽은 줄만 알고 소식이 없어 답답하엿습니다. 처음에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에서 죽을 고생하다가 한 사람읆 나나서 소자의 토시로 신표를 하여 보내어 어머님 함께 오시길 기다렸더니, 12월 20일 소식도 모르고 이날 나주옥으로 오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으니 우선 굶어 죽게되니 어찌 원통치 아니 하리요. 돈 300여량이 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주시오. 그간 집안 유고를 몰라 기록하니 어머님 몸에 혹 유고 계시거든 옆사람이라도 와야 하겠습니다. 부디부디 명심 불망 하옵고 즉시 오시기를 차망 복망하옵니다. 남은 말씀 무수하니 서로 만나 말 하옵기로 그만 그치나이다.
1894년 12월 28일 달문 상서 / 의복 상하벌, 보신한벌, 토시한벌, 주의한벌, 망건, 노자 2량. 온 사람과 함께 가 과세를 편히 할터이니 혹 가고가 잇어 못오면 옥동 가고골 한기수에게 의복지어 보내소서.
화순군 도암면 원천리 171-2 옥동마을 입구 동학 접주 절충장군 한영우의 묘소를 찾았다.
折衝將軍 淸州韓公 英愚 之墓(절충장군 청주한공 영우 지묘)
절충장군 해용양위 부호군, 동학농민혁명군 대장 휘 영우공은 자는 치화, 달문이요. 호는 묵헌이시다.
... 중략 ...
공은 아버지 자 경여 휘 경진 공과 어머니 유인 밀양 박씨 사이에 철종 10년 기미 6월 2일(서기 1859년)에 출생하셨다. 유년시절부터 영민
... 중략 ...
공은 아버지 자 경여 휘 경진 공과 어머니 유인 밀양 박씨 사이에 철종 10년 기미 6월 2일(서기 1859년)에 출생하셨다. 유년시절부터 영민
한 공은 기개 또한 웅장하여 상대를 압도하는 남다른 면모를 보이셨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이를 위해 헌신하리라 다짐하고 무에를 연마하는 한편 서책 또한 가까이 하셨다. 각별한 부모 봉양은 근동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으며 나가서는 남들의 본이 되셨고 들어와서는 인륜의 도리에 충실하셨다. 고종 23년 병무 광서12년(서기 188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대장 행용양위 부호군에 임명되어 국가의 크고 작은 재난에 솔선수범으로 대처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등 선행도 많았다. 그러나 평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의 소유자로 당시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의 권력 다툼에 회의(懷疑)를 느껴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자 동학농민혁명군대장으로 활동하던차 고종 31년 갑오 12월 나주 동창 유기 모시굴 점등(현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 전투에서 민보군에 잡혀 나주옥에 압송되어 장독(杖毒)으로 고종 32년 을미 4월 1일(서기 1895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공이 보여준 대소범절의 실천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정신은 후대에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셨다. 정부인 영양천씨와의 사이에 재기와 재인 형제를 두셨으며, 손자로는 관용, 성용, 봉용을 두셨고 이후로는 승철, 그리고 공의 현손인 상탁(시조 난공의 35대손)에 이르고 있으며, 후손 모두가 입신하고 번성한 가계를 이루고 있어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며 가문에 내린 특출한 두뇌와 곧은 정신을 이어받아 정성어린 양육의 결과라 여겨진다. 찬란한 덕행을 간략히 서술하여 자손 만대에 영전(永傳)코저 근(謹) 재배(再拜) 입비(立碑) 하나이다. 서기 2011년 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