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770-1
- 탐방로그
- 장희수 선생 항일 기적비는 장희수 선생 생가 앞에 위치해 있었다. 해당 마을에는 비석이 많았는데 알고보니 죽산안씨와 조씨의 집성촌이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공의 휘는 희수요 호는 모암이며 본관은 흥덕이니 충숙공 휘 연우의 후이다. 서기 1924년 갑자 6월 12일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770번지에서 휘 진홍과 김해김씨 오동을 고비로 하여 출생하였는데 천자가 영오하고 품성이 자상하였다. 생후 57일에 엄친을 여읜 공은 조고와 숙부의 지극한 종애와 훈육을 받고 취학 1940년 능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도내의 명문교인 광주공립농업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여 학생연대장과 교내 씨름선수로 활동하면서 전국 씨름대회에서 수차 우승하여 장사의 칭호를 받았다. 공은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하던 1944년 9월 5일 본교 5학년생으로서 일제의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동년 9월 15일 중국 산서성 안읍지구에서 군사훈련을 마치고 2소대 분대장이 되어 대원을 인솔하고 광동에 주둔한 일군경부대에 편입하기 위하여 이동 중 남경 한구 무창을 경유하면서 교포들로부터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탈출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남경에서 8명이 탈출을 시도하다 5명이 사살되고 3명이 체포 처형된 사건이 일어나 일군의 감시
가 더욱 삼엄해지자 공은 동년 12월 말일에 서둘러 결사의 동지 정건수 이순석 등 7명과 함께 작전지도와 무기를 탈취하고 광복군의 주재지를 향해 탈출하였다. 그러나 생소한 지형에다 즉시 추격해 온 일군에 의해 모두가 사살 또는 체포되는 위기에 처했었는데 이때 마침 중국 제74야전사령부 다온사 부대가 일군을 격퇴하고 공 등을 구출하여 도중에 전사한 이순석을 제외한 7명 모두가 구사일생으로 사지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공 등은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포로로 취급되어 감금되어 있던 중 철책 밖으로 던진 서찰의 내용이 광복군에 전달되어 이듬해 1월 10일 중경의 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에 인도되었다. 그리고 동년 1월 25일부터 토교에서 정치 경제 군사 사상 교육을 이수하고 동부대에 배속되어 임정요원들의 경위를 담당하면서 일군과의 교전에도 수차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종전 후에도 공 등은 한국외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화대표단으로 계속 체류하면서 한국어학회를 설립하여 귀국을 준비 중인 교포자녀들에게 한글과 고국의 풍속예절 등을 교육하고 이청천 장군을 호위하다가 이듬해 1946년 6월 8일에 이범석 장군의 인솔하에 임정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김구 선생으로부터 조선 경찰사관학교 1기생을 모집하니 상경하라는 통지를 받았으나 공은 노모의 봉양을 위해 불응하고 교단에서 활동하다가 중도에 사퇴하고 농업에 종사하다가 1990년 1월 17일에 향년 66세로 졸하였다. 사후에 공의 광복군 활동 사실이 인정되어 1990년 8월 15일에 정부로부터 독립훈장 애족장을 받고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하였다. 김해김씨 석자를 취하여 3남 1녀를 육하니 동인은 경주 김순정을 취하여 호현 지혜를 출생하였고 동호는 인천 이미영을 취하여 훈화 지원을 생하고 동태는 전주 이정선을 취하여 기원 부영 세현을 생하고 일옥은 남원 윤택호에게 가하여 효정 수정 승환을 생하였다. 오호라. 공이 청명한 자질로 정훈을 복응하여 명문교에 진학하였으니 태평한 시대를 만났더라
면 능히 영친의 현달을 하였을 것이고 이역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하였으니 조국의 창군에 참여하였더라면 국가의 간성으로 도한 기여했을 것이언만 명운이 비색하여 여생을 전야의 사부로 마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의 자손들이 공의 의적을 수집하여 국가의 포상을 받고 지업을 계술하여 문호를 빛내고 있으니 이 어찌 유공필상이며 목식지보가 아니랴. 유지인사들이 공의 이력을 현창하여 후생들의 애국정신을 고취코자 건비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초윤 동인 강진 중앙초등학교장으로 하여금 나를 방문케 하여 비문을 청하기에 감히 고사치 못하고 행장에 의거하여 사실을 우와 여히 약술하였다.
서기 2004년 갑신 4월 일 전라남도 교육감 청도 김장환 찬 선산 류종택 서
서기 2004년 갑신 4월 일 전라남도 교육감 청도 김장환 찬 선산 류종택 서
장희수 선생의 생가는 효산1구 마을회관 바로 옆이었다.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770-1 장희수 선생 생가 앞 모암 장희수 애국지사 항일 기적비를 찾았다.
애국지사 모암(慕唵) 장희수(張凞洙) 항일 기적비 - 관리번호 : 50-1-49 / 관리자 : 흥성장씨 효산 문중 대표 장동연
이 곳은 애국지사 모암(慕唵) 장희수(張凞洙)님의 생가이며, 비는 애국지사님의 공적을 기리는 항일 기적비입니다.
애국지사 장희수님은1924년 갑자(甲子) 6월 12일 태어나 생후 57일만에 아버님을 여의고, 어머님의 총애와 훈육의 덕으로 능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도내의 명문교인 광주농업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진학하여 학생연대장과 씨름 선수로 명성을 날렸으나 4학년 때 일본제국의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강제 징집 후 중국 산서성 안읍지구에서 군사 훈련을 마치고, 2소대 분대장이 되어 대원을 인솔하고 중국 광동에 주둔한 일본군에 편입하기 위하여 이동 중에 교포들로부터 중경에 광복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 7명을 규합하여 작전지도와 수류탄, 권총 등 무기를 탈취하여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였다. 탈출 즉시 발각되어 추격해 온 일본군과 교전하며 광복군의 주둔지를 향해 무작정 달렸으나 생소한 지형에다 몇 배나 더 많은 일본군을 당할 수 없어 대원 모두가 사살 또는 체포될 위기에서 때마침 찾아온 중국 74야전사령부 다온사 부대와 합세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당시 약관(20세의 나이)에 광복군 총사령부에 입대하여 정치, 경제, 군사, 사상교육을 마치고 이범석 장군의 휘하인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치되어 임시정부 요원들의 경호와 총사령부의 경비 업무를 수행하면서 수차례 전투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임시정부가 환국한 후에도 주화대표단으로 중국에 남아 중국과의 외교 문제 해결 및 망명 동포와 수시 연락을 취하는 등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였고, 임시정부 요원 자녀들의 귀국 준비를 위한 한글 교육, 풍습 예절교육 등을 시키면서 이청천 장군을 호위하다가 1946년 6월 8일 이범석 장군의 인솔 하에 다시는 못올것 같았던 조국 대한민국 땅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 김구 선생님으로부터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제의받았으나 홀로 계신 어머님 곁을 떠날 수 없어 사양하고 교직에 복무하다가 그만 두고 이 곳에서 농사를 지으시다가 1990년 1월 17일 지병으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명석한 두뇌와 투철한 애국정신을 가지고 명문교에 진학하였으니 태평한 시대를 만났더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하였을 것이고, 김구 선생님의 부르심을 받았더라면 국가의 큰 인물이 되어 기여한 공이 지금보다 더 했으련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돌아가신 후에야 그 공을 인정받아 1995년 8월 15일 건국 훈장 애족장(제 418호 대통령)을 수상하였으며,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2-97묘역에 부인 김석자 여사와 함께 안장되었다. 평소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 그리고 고향 발전에 대한 애향심이 남달랐기에 고인이 된 지금도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함께 고향 효산리의 발전과 주민들의 행복을 빌고 계시리라...
이 곳은 애국지사 모암(慕唵) 장희수(張凞洙)님의 생가이며, 비는 애국지사님의 공적을 기리는 항일 기적비입니다.
애국지사 장희수님은1924년 갑자(甲子) 6월 12일 태어나 생후 57일만에 아버님을 여의고, 어머님의 총애와 훈육의 덕으로 능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당시 도내의 명문교인 광주농업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진학하여 학생연대장과 씨름 선수로 명성을 날렸으나 4학년 때 일본제국의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강제 징집 후 중국 산서성 안읍지구에서 군사 훈련을 마치고, 2소대 분대장이 되어 대원을 인솔하고 중국 광동에 주둔한 일본군에 편입하기 위하여 이동 중에 교포들로부터 중경에 광복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 7명을 규합하여 작전지도와 수류탄, 권총 등 무기를 탈취하여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였다. 탈출 즉시 발각되어 추격해 온 일본군과 교전하며 광복군의 주둔지를 향해 무작정 달렸으나 생소한 지형에다 몇 배나 더 많은 일본군을 당할 수 없어 대원 모두가 사살 또는 체포될 위기에서 때마침 찾아온 중국 74야전사령부 다온사 부대와 합세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당시 약관(20세의 나이)에 광복군 총사령부에 입대하여 정치, 경제, 군사, 사상교육을 마치고 이범석 장군의 휘하인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치되어 임시정부 요원들의 경호와 총사령부의 경비 업무를 수행하면서 수차례 전투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임시정부가 환국한 후에도 주화대표단으로 중국에 남아 중국과의 외교 문제 해결 및 망명 동포와 수시 연락을 취하는 등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였고, 임시정부 요원 자녀들의 귀국 준비를 위한 한글 교육, 풍습 예절교육 등을 시키면서 이청천 장군을 호위하다가 1946년 6월 8일 이범석 장군의 인솔 하에 다시는 못올것 같았던 조국 대한민국 땅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 김구 선생님으로부터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제의받았으나 홀로 계신 어머님 곁을 떠날 수 없어 사양하고 교직에 복무하다가 그만 두고 이 곳에서 농사를 지으시다가 1990년 1월 17일 지병으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명석한 두뇌와 투철한 애국정신을 가지고 명문교에 진학하였으니 태평한 시대를 만났더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하였을 것이고, 김구 선생님의 부르심을 받았더라면 국가의 큰 인물이 되어 기여한 공이 지금보다 더 했으련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돌아가신 후에야 그 공을 인정받아 1995년 8월 15일 건국 훈장 애족장(제 418호 대통령)을 수상하였으며,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2-97묘역에 부인 김석자 여사와 함께 안장되었다. 평소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 그리고 고향 발전에 대한 애향심이 남달랐기에 고인이 된 지금도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함께 고향 효산리의 발전과 주민들의 행복을 빌고 계시리라...
愛國志士 慕菴 興德張公 凞洙 抗日紀蹟碑(애국지사 모암 흥덕장공 희수 항일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