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홍 의적비

4

주소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 700-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공의 묘는 양정 후록에 안장되셨으니 묘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경한 선생이 찬병(撰并) 두전서(頭篆書)하고 延羅石 현민식(玄玟植) 선생이 소자(小字)를 쓰다. 공은 정부로부터 건국훈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니 송가비(頌歌碑)를 수립(竪立)함에 즈음하여 첨기(添記)하나이다.
제 479호 / 훈장증 / 고 양재홍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애국장 / 1990년 12월 26일 / 대통령 노태우 / 국무총리 강영훈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입함 / 총무처장관 이연택

제 876호 / 포장증 / 고 양재홍
위는 우리나라 건국사업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포장을 추서함
건국포장 / 1977년 12월 13일 / 대통령 박정희 / 이 증을 건국포장부에 기입함 / 총무처장관 심홍서
驪興 閔氏 和順 入鄕祖(여흥 민씨 입향조)
義庵公 諱 懷參 最初 棲遁 遺址碑(의암공 휘 회삼 최초 서둔 유지비)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 700-2 달마루골 마을 입구 애국지사 운포 양재홍 선생 의적비를 찾았다.
雲圃 梁先生 在鴻 義蹟碑(운포 양선생 재홍 의적비)
雲圃 梁先生 在鴻 義蹟碑(운포 양선생 재홍 의적비)
조선왕조의 5백년 사직이 陸沈(육침)의 비운에 잠기고 신구의 문물제도가 혼연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때 지사 인인의 한 분으로 공인된 분이 운포 양재홍공이다. 공은 일찌기 호남명문에 태어나 성품이 강항하고 의표가 외유내직하였다. 족내에 화은 재해공에게 취학하여 시례의 가업이 전승되었고 호학 입지한 바가 출중하였다. 당시 경술국치가 임박하고 해내의 명사들이 존양대의와 국권 회복을 창도하고 있을때 공은 또한 약관의 나이에 오당에서 훈목된 광간의 기상을 발휘하고자 분연이 일어나 이에 종사하였다. 회천대업에 수많은 동지를 규합하고 왜적의 침략 흉계를 초멸코자 10년 웅도를 기다리고 있던 바 적세의 팽창과 더부러 기밀이 누설됨으로서 무오5월에 노수의 몸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은 적의 검수도 산속에 있었으나 피아간의 심문시에 충군애국의 의연한 자세는 강하의 지주처럼 보였다. 공이 옥중에서 겪었던 신산고초와 태연한 거동은 적도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하고 그들의 대응책을 무색케하였다. 조차의 순간 일시라도 선철의 유훈을 흠패하고 소순의 맹자론을 일야통독함으로써 호연의 기개충만되였고 이 영향은 옥리들을 감화할 정도였다. 세월은 荏苒(임염)하여 유설의 곤욕이 10년이상 계속되였고 그 사이 양친이 또 별세하니 공은 생전에 자식의 못다함을 한스럽게 여겨 출옥후에는 사친의 도리를 닦음에 가진 정서을 기우렸다. 만년에는 시가통흠으로 칠실(漆室)의 우탄을 달래고 있던 중 홀연 와병하여 갑신 8월 23일에 서거하였으니 향년 57
세였다. 공이 이룩한 충효양전(忠孝兩全)의 행장(行狀)은 어떠한 풍비거석(豊碑巨石)으로도 이를 방불(髣髴)하기 어렵다. 국가의 운명이 한번 존망의 위기에 처할때 공은 일개(一介) 초개(草芥)의 신자(臣子)일지언정 몸소 정의의 소재를 실천하였고 옥중 및 만년까지 초지(初志)를 관철한 정충대절(精忠大節)은 세도인심(世道人心)을 바로잡는데 있어 병연(炳然)한 일생처럼 후인들의 지표(指墂)가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서기 1971년 5월 일
雲圃 先生 頌歌(운포 선생 송가)
雲圃 先生 頌歌(운포 선생 송가) - 義蹟碑 除幕(의적비 제막)에 즈음하여
물 맑은 월곡 땅에 서기한결 어리이고 피맺힌 의로움은 이제 더욱 빛나리니 이비에 임 자취 새겨 길이 받드오리다
나라의 부끄러움 억누르지 못하신 채 광복을 다짐하온 동지들을 이끄시고 해외의 투사 도우시던 뜻을 새삼 기립니다
기미의 만세소릴 옥중에서 들으실 제 왜적을 꾸짖음이 추상같이 엄하시고 동지의 죄 두루모아 임이 홀로 지셨다니
10년 만에 환가해도 자유없는 몸이시라 때로는 시와 술로 한스런 가락따라 더덩실 춤을 추셔도 목이 메어 우셨으리
해방을 한해 앞서 훌훌히 떠나신 임 능주고을 깊은 밤에 큰 별 하나 지셨는데 이제사 등불 밝히려 임의 얼을 새깁니다
1971년 5월 16일 / 한국문인협회 전남지부장 허연 읊음 / 2005년 8월 일 영주 이돈흥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