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기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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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328
탐방로그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328 능주향교 앞에 있는 조준기 선생 기적비를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328 능주향교 앞에 있는 조준기 선생 기적비를 찾아왔다.
우국지사 인봉 조준기 선생 기적비(憂國志士 仁峯 曺俊奇先生 紀績碑)
先生(선생)의 諱(휘)는 俊奇(준기) 號(호)는 仁峯(인봉) 本貫(본관)은 昌寧(창녕)으로 庚寅西紀一八九○年閏二月一日 全南和順郡綾州(전남화순군능주)에서 考諱秉南公(고휘병남공)과 ○全州崔氏(비전주최씨)의 三男(삼남)으로 出生(출생)하였다.
先生(선생)은 天性(천성)이 慧悟(혜오)하고 好學多才(호학다재)하여 일찍부터 鄕黨(향당)의 與望(여망)을 걸머지고 있었다.
私塾(사숙)에서 修學(수학)하여 學問(학문)이 大進(대진)하였는데 十六歲(십육세) 때에 乙巳保護條約(을사보호조약) 二十歲(이십세)때에 朝日合邦(조일합방)으로 祖國(조국)의 覆滅(복멸)을 目睹(목도)하고 悲痛(비통)한 나머지 三日(삼일)을 號泣絶食(호읍절식)하였다.
그러나 悲憤(비분)만이 能事(능사)가 아님을 깨닫고 奮然(분연)히 일어나 祖國(조국)의 主權回復(주권회복) 自主獨立(자주독립)을 爲(위)한 抗日鬪爭(항일투쟁)에 生命(생명)을 바칠것을 決意(결의)하고 이 鬪爭(투쟁)의 첫 出發(출발)로 生死(생사)를 같이 할 同志(동지)를 糾合(규합)하여 綾州靑年會(능주청년회)를 組織(조직)하고 衆意(중의)에 따라 會長(회장)이 되어 熱血(열혈)의 靑年鬪士(청년투사)를 많이 包攝(포섭)하였다.
同時(동시)에 州民(주민)의
敎育(교육)과 啓蒙(계몽)이 時急(시급)하므로 育英義塾(육영의숙)을 設立(설립)하고 特(특)히 晩學徒(만학도)에게 新學問習得(신학문습득)의 機會(기회)를 주어 數(수) 많은 英才(영재)를 養成(양성) 하였다.
또 言論抗爭(언론항쟁)에 눈을 돌려서 東亞日報綾州支局(동아일보능주지국)을 開設(개설)하고 仁村(인촌) 金性洙(김성수) 古下(고하) 宋鎭禹(송진우) 先生(선생) 等(등) 名士(명사)를 招請(초청)하여 啓蒙講演會(계몽강연회)를 開催(개최)하고 靑老年(청노년)들의 體育(체육)을 위하여 各種運動競技(각종운동경기)를 장려하고 演劇團體(연극단체)까지 招致(초치)하여 州民(주민)의 文化啓蒙(문화계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先生(선생)의 이 같은 눈부신 活動(활동)으로 州民(주민)들의 抗日精神(항일정신)과 文化意識(문화의식)이 크게 昻揚(앙양) 되었는데 日帝(일제)의 奸惡(간악)한 兇計(흉계)로 州民(주민)에게 阿片吸煙(아편흡연)이 隱然中傳播(은연중전파))되어 其害毒(기해독)이 莫大(막대)하므로 先生(선생)은 阿片中毒者(아편중독자)들을 徹底(철저)히 啓蒙團束(계몽단속)하여 마침내 州內(주내)에서 阿片吸煙(아편흡연)을 根絶(근절)시켰고 한편 從來(종래)의 陋習(누습)으로 學童(학동)들이 常民階級(상민계급)의 子弟(제자)와 同學(동학)하기를 拒否(거부)하므로 先生(선생)은 앞장서서 이들을 說得(설득)하여 同學(동학)하게 하므로 階級打破(계급타파)의 先驅的示範(선구적시범)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 같은 熱烈(열렬) 한 抗日獨立運動(항일독립운동)으로 乙丑年(을축년) 西紀一九二五年에 日警(일경)에게 逮捕(체포)되었는데 그들의 苛酷(가혹)한 拷問(고문)에도 끝내 屈(굴)하지 않고 드디어 白紙送廳(백지송청)으로 西大門刑務所(서대문형무소)에서 四年의 獄苦(옥고)를 치렀다. 出監後(출감후) 拷問(고문)에 依(의)한 得病(득병)으로 己巳年(기사년) 西紀 一九二九年八月八日에 四十歲(사십세)를 一期(일기)로 別世(별세) 하였다.
未亡人(미망인) 崔氏(최씨)는 至誠(지성)으로 三男三女(삼남삼녀)를 養育(양육)하여 훌륭히 成人(성인)시킨 後(후) 壬子年(임자년) 西紀一九七二年 十二月十一日에 八十七歲(팔십칠세)로 永眠(영면)하였다.
長男(장남) 圭瓚(규찬)은 先丈(선장)의 遺志(유지)를 이어서 大學(대학)때에 有名(유명)한 反帝抗日運動(반제항일운동)으로 獄苦(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其後(그후) 醫學博士(의학박사)로 全南大學校大學院長(전남대학교대학원장)으로 歷任(역임)했고 次男(차남) 圭琿(규혼) 三男(삼남) 載善(재선)이다. 社會(사회)에 奉仕(봉사)하고 있다.
슬프다. 先生(선생)은 祖國(조국)의 光復(광복)을 못본채 千秋(천추)의 恨(한)을 품고 長逝(장서)하였으나 그 高邁(고매)한 人格(인격)과 熱烈(열렬)한 憂國至誠(우국지성)은 靑史(청사)에 燦然(찬연)히 光輝(광휘)를 發(발)할 것이며 國民(국민)에게 不滅(불멸)의 龜鑑(귀감)이 될것이다.
뜻을 모은 우리 紀績碑建立委員會(기적비건립위원회)는 先生(선생)이 남기신 功勳(공훈)을 永遠(영원)히 기리기 爲(위)하여 여기 이 碑(비)를 세운다.

己丑西紀一九八六年五月 日
高麗大學校名譽敎授文學博士 趙容萬(조용만) 謹撰(근찬)
題 國展招待作家光山后人 金相筆(김상필) 謹書(근서)
文 前國會議員 長興后人 高永完(고영완) 謹書(근서)
憂國志士仁峯曺俊奇先生紀績碑建立委員會 委員長(위원장) 梁會英(양회영) 建立(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