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주면 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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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 104-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들고 적을 토벌하지는 못했으나 혈서로써 통감부를 질책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니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우리나라에도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사람들이 할수 없는 일을 공이 해냈으니 백세후에 공의 풍도를 들은 사람들은 반드시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리라. 광복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1977년 12월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고 1989년 3월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이장하니 그나마 공에게 위로가 될런지 모르겠고 후진들이 공의 영전에 명복을 비는 바이다.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리 104-4 남면사무소 건너편 순국선열 규사 송주면 순절비를 찾아왔다.
순국선열 규사 송주면 순절비
이곳은 화순군 남면 사평리 출신 순국선열 규사 송주면선생의 순절비가 세워진 곳입니다. 1905년 10월 일제의 침략이 더욱 거세지자 공은 이에 항의하여 중추원 의관 정삼품직을 사직하였으며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강토를 내놓아라'는 요지의 혈서를 일제 통감부에 보내고 절명시 5수를 남긴 다음 사평천에 나아가 투신 순절하였습니다.
순국선열 규사 송주면 순절비
경술년(서기 1910년) 국치를 우리민족 근대사에 가장 치욕적인일로 기억조차 하기 싫다. 나는 규사 송공 ???일다가 당시의 억울한 일을 생각해보니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잃어버린 강토를 회복할 길은 영영 사라지는가? 도이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켜 끝까지 굴하지 않고 항전하다 전사한 열사가 있는가하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전재한 선열도 있고 분통한 마음을 간직한채 충절을 지켜 순국한 분이 17명이나 되는데 규사 송공주면이 그 중의 한분읻가. 공은 대대로 많은 선비를 배출한 소평송씨문중에 태어나 순박영오한 자질로 유년시절에 중국역사의 고대기록인 통감을 즐겨 읽었는데 그중에도 의사인 예양과 왕촉의 말을 크게 써놓고 날마다 세번씩 읽었다. 성동이 되어서는 대학자인 기노사와 최면암 두 스승을 사사하여 서신과 대면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는데 노사선생께서 작고하시니 공은 문하에 늦게 든것을 통한하고 면암선생에게 성의를 다하였으니 면암선생께서 대마도에 유배되자 친히 바다를 건너 선생을 배알하고 격려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21세때의 일이다. 평일에 독서를 즐겨했는데 좋은 글귀를 가려내 다섯가지 자경문을 지어 이의 실천에 유의하였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데 몸소 실천하였으며 자신만 배부르게 먹고 사는건 더러운 일이다고 하였다. 갑오응제시에 합격했으나 은전을 받지 않았고 무술년에는
연재 송선생을 배알하였고 신축년에 주사에 임명되고 임인년에 본읍의 향약장이 되었는데 이때 웬만한 경비는 자담하였으므로 군수 이사필과 순찰사 신응수가 그 창박을 보고 공의 청렴함에 크게 감복하여 부끄럽게 여겼다. 기묘년에 중추원의관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 통정대부에 올랐다. 공이 관직에 나간것은 한번 큰일을 해보려고 하였지만 당시 조정이 부패하여 여의치 못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왔는데 간혹 규당 정범조, 영재 이건창, 난사 강우성, 무정 정만조, 매천 황현, 일신 정의림등 제공과 더불어 시를 짓기도 하고 담론하면서 강개하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5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표학 경술년 8월에는 종사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혼절했다 깨어나 이곳에 서산이 없으니 어느곳이 동해인가 구차하게 하루를 살면 하루가 더 욕된일이라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곤욕을 당하고 있어도 이제 회복할 대책도 없고 내 몸둘곳도 없으니 나는 지금죽음으로써 국은에 보답하겠다하고 손가락을 깨어 총독부에 보낼 혈서를 써서 도이들의 배의무신함을 질책하고 또 절명시와 계자유사를 지어 자신은 이미 나라에 메인몸이지만 천하에 불효자라 하면서 계자 익회에게 조부님을 잘 봉양하라 부탁하고 리사에 나아가서 북녘 대궐을 향하여 네번 절하고 비상 다섯알을 먹었는데 옆에 있던 가족에게 발견되어 구제되었다. 그러나 그날밤 가족들이 모두 잠든틈에 즉시 마을앞 냇불에 가서 몸을 묶은후 투신하여 목숨을 스스로 끊으니 8월 15일이었다. 아! 슬프다 천하에 죽지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만 선비는 때를 만나 죽는것이 소중한것이다. 공이 이처럼 왜놈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분통하게 절명하였으니 그 애군우국하는 정성이 천재토록 빛나리라. 하루는 공의 손자인 주석보가 내게 비명지어주기를 요청하는데 나는 불문으로 기인이 아닌데도 가까운 일가로 사양할수 없어 다음과 같이 명하나니 왈
저 소평천을 바라노니 격렬한 물결소리 원통함을 호소하는듯하고, 꾸짖는것 같기도 하다. 지난 경술년의 국치를 뉘라서 한을 품고 원통해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오만은 오직 공만은 일찍부터 의와 생명의 중함을 판단하여 충성하는 길을 택하였으니 동해에 빠져죽겠다고 말한 제나라 의사 노중연과 멱나수에 빠져죽은 충신 굴원으로 더불어 의가 서로 맞고 도도 또한 같가도 할것이다. 비록 총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