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안동리 산13
- 탐방로그
- 이형춘 선생 후손(외손)되시는 분께서 묘소까지 함께 동행해주신 덕분에 길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이형춘 선생 묘소는 해남군 해남읍 안동리 산13에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지사 경주이공형춘지묘
선생의 휘는 형춘이시니 자는 태종이요 호는 설제이며 경주이씨이다. 시조는 휘 갈평이시니 호 표암이요 신라 개국원훈으로 하찬을 지내시었다. 누전하여 휘는 제현이시니 호는 익제요 정당문학령 예문관사 문하시중우로 계림부원군에 봉작되었고 시 문충이시며 고려왕조실록을 편찬했고 당세의 문장으로 크게 뛰어났다. 공민왕묘에 배향되고 경주 구강서원과 도산서원에 모시었고 저서로 익제집과 유록이 전해오고 있다. 생 휘는 달준이니 호 설와요 전리총랑으로 임해군에 추대되었고 새 휘는 수림이니 한림학사요 곧 공의 파조이시다. 주전 지휘는 덕민이니 조선 숙종조에 증가선대부요 남하 해남하여 연곡에 정착하시니 시위공 8대조이다.
증조 휘는 순곤이요 조의 휘는 중용이며 고의 휘는 근욱이요 비는 여산송씨 채묵의 녀이다. 공은 3남 중 차남으로 고종 정해 1887년 8월 24일에 태생하니 자유로 영특하시고 장성하여서는 의협의 기풍이 출중하였다. 광무 강희년간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나라없는 백성으로 노예의 신세가 되어 한국 유사 이래 국치민욕이 이같은때가 없었다. 위인걸사는 국내외에서 충담의혈로 의병을 일으키었고 선생께서는 또한 년24세의 젊은 나이로 국치민욕을 설월하고자 동지를 규합하여 조국독립을 쟁취코자 제자인 조종운을 연락책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시었고 기미 3.1운동때 해남읍 시가에서 여러동지와 함께 일본 침탈의 야만행을 규탄하면서 우리 한국은 자주국가임을 세계우방에 선포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하시다 왜경에 피체되어 가진 고문을 겪으면서 장흥법원의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고 불복 상고로 광주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의 선고형으로 옥고를 치루고 출옥 후 고문 후휴증 병든 몸으로 매우 조심스러히 독립운동을 계속하디가. 광복 후 민국 28년 병술 11월 22일에 당년 29세로 졸하니 묘는 해남읍 안동리 산 13번지 자좌원에 장례하다. 배는 이천서씨 화산의 녀요 1890년에 경인 3월 8일에 나서 유부덕하시다. 1976년 병진 12월 12일에 졸하니 묘는 여공합조이다. 유 2녀하니 왈 상순과 상심이요 외손에 이노경과 이동훈이다. 아! 이선생님이시여 국치를 설원코자 동지를 규합 3.1운동에 해남대표로 동지 김동훈 지사와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일본 침탈의 만행을 규탄하는 대의를 실행하신 애국지사님이였기에 늦게나마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의 건국사업포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유공자증서를 받았다. 아!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리요. 이제 비를 세우고자하여 종중
과 외손이 와서 각할 글을 구하므로 근안가장하여 약술 여우하고 이어 명왈 공의 행적 살펴보니
충과효로 근대삼아 국치민욕 설원코저
동지규합 모의하여 왜적만행 선포하고
구국운동 하시었네 우국애정 돌에새겨
후진들의 귀감으로 영세불망 빛이되리
충과효로 근대삼아 국치민욕 설원코저
동지규합 모의하여 왜적만행 선포하고
구국운동 하시었네 우국애정 돌에새겨
후진들의 귀감으로 영세불망 빛이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