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묵 순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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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447
탐방로그
마을 앞 입구에 있었던 지강 양한묵 선생 순국비가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447로 옮겨져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왜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투철한 민족혼을 발휘하여 왜인들을 감탄케 하고 극악무도한 악형으로 동년 5월 26일 56세를 일기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복장)을 수여하였고 저서로는 無體法經(무체법경)과 東經演義(동경연의) 등이 있다.
지금까지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만한 기념물 하나도 고향 땅에 없는 것이 한이었으나 선생이 이 곳에 나서 순국하신지 72년만에 국비 도비 군비로 해남군이 시행하여 이 곳 생가의 마을 앞에 순국비를 세우다.
서기 1991년 11월 30일
문학박사 송정현 삼가 기록하고 통천후인 최용규 삼가쓰다
지강 양한묵 선생 순국비
지강 양한묵 선생 순국비
단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베푸신 뒤 오천년에 이르는 동안 흥망의 변고가 여러 번 있었어도 민족의 명맥이 끊긴 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처음 있었던 참변이었다.
지강 양한묵 선생은 3.1독립운동 민족대표로서 그들과 맞서 싸우다 옥중에서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셨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선열은 호국의 기둥이시니 더러 한 분이 흘리신 피로 인하여 겨레가 활기를 찾고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이여!
해남이 낳은 나라의 얼이신 선생 그 분은 비록 가시었으나 겨레 위한 삶과 애국의 고귀한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귀감이 되어 청사에 길이 빛나리.
단기 4천 3백 2십 4년 3월 1일 광복회장 이광훈 삼가짓고 고암서실장 최용규 삼가쓰다
지강 양한묵 선생 순국비는 원래 마을 앞 입구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 관리번호 : 50-1-18
이곳은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신 지강 양한묵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현충시설입니다.
1991년 해남군이 주관하여 조국 수호에 일생을 바치신 분의 공훈을 드높이고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설치한 시설로 해마다 3.1절과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순국 선열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호국 보훈을 생각하는 자리이니 주변 청결에도 유의합시다.
해남군수
지강 선생기
선생의 휘는 漢默(한묵)이요 자는 吉仲(길중)이요 호는 芝江(지강)이요 본관은 제주라. 서기 1862년 4월 29일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相泰(상태)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까지 이 곳 小心齊(소심제)에서 한문학을 수학하였고 19세에 화순으로 이거하여 1894년에 탁지부 주사가 되어 1897년까지 재직하다가 뜻을 구국에 두고자 관직을 그만두고 중국을 여행하며 일본의 국정과 세계정세를 통찰하였다. 1902년 일본 奈良(나라)에서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선생과 함께 동학에 입교하였고 진보회를 결성하여 구국민중운동을 지도하였다. 1905년 이용구 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에 대항하여 이준 열사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이듬해에 손병희 권동진 선생과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하여 法道師(법도사)와 職務道師(직무도사)로 교리연구와 포교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