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묵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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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44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447 민족대표 33인 지강 양한묵 선생 복원 생가를 찾았다.
독립선언 민족대표 지강 양한묵 선생(獨立宣言 民族代表 芝江 梁漢默 先生)
독립선언 민족대표 지강 양한묵 선생(獨立宣言 民族代表 芝江 梁漢默 先生)
지강 양한묵(梁漢默,1862~1919) 선생은 천도교 계통의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전남 출신이자 유일한 옥중 순국자의 한사람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조(景朝) 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이다. 해남군 옥천명 영신리에서 1862년에 양상태(梁相泰)와 낭주최씨(郎州崔氏) 사이에 태어난 양한국 선생은 1894년(고종31)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로 화순군(和順郡) 능주(綾州)에서 세무관리로 근무하였고 1897년(광무 1) 관직에서 물러나 중국
1902년 일본에서 망명 차 와있던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権東鎮), 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와 천거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그는 1900~1910년대에 이르기까지 천도교 교세의 확장과 각종 교리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을 뿐만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하여 호남학회(湖南學會)와 공진회(共進會) 그리고 이준(李儁)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크게 활동하였다. 1906년 손병희,권동진 등과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하고,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 우봉도(右奉道)가 되었으며, 1909년 법도사(法道師)를 거쳐 1911년에는 직무도사(職務道師)가 되어 서울강습소를 개설하였다. 지강 양한묵 선생은 나라를 빼앗긴 이유가 백성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1911년 기호학교와 동덕여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을 통해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만세를 하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지강 양한묵 선생은 일본 경찰의 온갖 학대와 고문 속에서 시달리다가 1919년 5월 2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인에 많은 의문점을 남긴 채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눈을 감고 말았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지강 양한묵 선생의 유해(遺骸)는 1919년 서울 수철리에 안장되었다가 천도교 측의 주선으로 3년 후인 1922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앵무산에 이장되었다. 화순읍 남산에는 화순군민의 성금으로 지강 양한묵 선생의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고 1991년에 고향인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 순국비가 세워졌다.
지강 양한묵 생가
지강 양한묵 기념관
지강 양한묵 생가
선생은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양상태(梁相泰)와 낭주최씨(郎州崔氏)를 부모로 1862년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자는 경조(景朝) 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이다. 19세에 풍산홍씨(豊山洪氏)와 혼인하면서 처가가 있는 나주군(羅州郡) 남평면(南平面) 송촌(松村)으로 이주하기전까지 이곳에 거주하였다.
※ 현재 산포면(山浦面) 소재

지강 양한묵 기념관
지강 양한묵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중 유일하게 옥중 순국하신 분으로 기념관은 선생께서 옥사하신 서대문형무소의 외형을 본따서 만들었다. 1919년 2월 27일 천도교를 대표하여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3월 1일 민족대표들과 함께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여 대한독립을 외쳤으며,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불참하였음.
일제의 가혹한 취조를 받던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56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선생의 시신은 서울 수철리에 안장하였다가 3년 후 화순군 앵남리에 이장되었다.
지강 양한묵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