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적암 의병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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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20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심적암 의병 사적비
호국불승 청허당 서산 대사의 유촉이 살아 숨쉬는 두륜사 대흥사는 한말 의병의 마지막 전적지 심적암이 있는 곳이다. 여기는 우리나라를 빼앗으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장렬하게 산화한 선열의 거룩한 피가 진홍빛 동백으로 피어나서 장춘 구곡을 굽이굽이 적시고 흐르는 통한의 땅이요, 충의의 땅이며, 만년불훼의 따이다. 2003년 2월 15일 강역의 최남단 10만 해남군민이 한가지로 뜻을 모아 여기에 그 날에 산화한 거룩한 선열의 위령탑을 모시고, 사적비를 세워 마침내 백년 통한의 달래나니, 뒤늦은 회한을 탄식할지언정 이를 어찌 아름답다 갸륵하다 이르지 않으리요.
이에 이 비의 후면에 1909년 7월 9일 오전 4시에 벌어졌던 심적암 전투의 역사적 사실을 간추려 기록함으로써 겨레의 가슴마다 나라 사랑과 겨레 사랑의 뜨겁고 아름다운 불꽃이 활활 피어나기를 축원한다.
2003년 2월 15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문학박사 이성무
심적암 전투 사적기
광무9년(1905)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이 모두 일본에 넘어가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항일의병이 봉기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호국충절의 땅 전남의 의병은 저들의 전남폭도 대토벌작전 문서에서 밝혀진 바와같이 임진왜란의 치욕적 패전을 되씹게 하였으니, 그 문서에 기록하기를 임진란의 옛날을 몽상하여 일본인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는 고로, 산간 도서의 한민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의 무위에 경탄 전율케하여 일본 역사상의 근본적인 명예 회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했다.. 1910년 한일합병 전야에 4년간에 거려 자행한 저들의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은 사나운 짐승으로도 차마 못할 정도로 잔혹한 행위였다. 그 참상을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사방을 그물 치듯이 포위해 놓고 집집마다 빗듯이 뒤져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즉시 죽였다. 의병들은 숨을 곳이 없어 강한 자는 앞으로 돌진하여 싸워서 죽고, 약한자는 달아나다 칼을 맞았다. 점차 쫓기어 강진, 해남 땅에 이르니 땅이 다하여 죽은 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마지막 땅 해남에서 벌어진 심적암 전투에 관혀여 저들의 경찰문서 전남폭도사는 "1910년 7월 8일 밤, 해남수비대장 요시하라 대위 이하 22명, 경찰관 3명, 헌병 4명이 적도 토벌을 목적으로 대흥사로 출동했다. 1909년 7월 9일 오전 4시, 이 절을 포위 공격했는데 적도는 깊이 잠들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로 있다가 전멸했다. 적22명을 죽이고 8명을 포로로 했으며 화승총 47, 군도5를 노획했다. 9월 18일 수괴 황두일의 부하 21명, 19일 4명이 해남수비대에 투항했다"라고 적고 있다.
황준성의 재판기록에서 밝혀진 심적암전투 지도자는 황준성, 황두일, 추기엽, 강성택 등 4인이며, 참전의병의 총수는 최소한 65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GPS상의 주소는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204이다.
심적암 의병 위령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