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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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 1023
탐방로그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 1023 애국지사 이상순의 묘를 찾았다.
네비게이터가 가르키는 곳으로 왔지만 들어가는 입구가 없다.
위성지도를 보면서 큰 길로 나오니 저곳이다.


이상순은 전라남도 해남(海南)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독립만세가 일어났을 때 우수영(右水營)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을 못하고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던차에 1920년 4월 22일 문내면 우수영(門內面右水營) 보통학교 학생인 윤인섭(尹仁燮)·전유봉(全酉峰)·이준섭(李俊燮)·박동수(朴東秀)·최이규(崔伊奎)·주봉옥(朱奉玉)·박규성(朴圭星)·박용문(朴用文)등 청년들이 독립만세시위를 결행하기로 발의(發議)하여 윤인섭·전유봉·이준섭이 동외리(東外里) 성벽 밖에서 태극기 3개를 만들어 각기 1개씩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행진하며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일본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양성룡(梁成龍)·주영철(朱永澈) 등과 함께 연행된 청년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하자,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태극기를 만들게 하는 한편,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일시 귀향 은거하고 있던 최원석(崔元錫)에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격문을 작성하도록 부탁하여, 청년들로 하여금 등사케 하였다. 4월 23일 오후 7시경 5백여명의 시위군중이 선두리(先頭里)의 선창가로 몰려들었고, 미리 만들어진 태극기와 격문이 다 돌려졌을 무렵 그는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동문(東門)을 향하여 행진하였다. 그러자 동외리 경찰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형세가 매우 불리한 것을 알고 해남경찰서에 응원을 요청하였다. 군중이 평화적으로 시위하며 읍내를 몇차례 행진하고,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을 때 해남경찰서로부터 불러들인 일본의 무장병이 총을 쏘고 총검을 휘둘러대니, 그는 시위군중의 안전을 위하여 양성룡·주영철·김종호와 함께 스스로 주동자임을 자처하여 다른 시위군중을 무사히 귀가시킨 후 체포되었다. 결국 1920년 5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 1023 애국지사 이상순의 묘를 찾았다.
함평이씨 특평공파 세장산
애국지사 함풍이공 상순지묘
애국지사 함풍이공 상순지묘
공의 휘는 문헌 자는 상순이며 호는 지암이고 본관은 함풍이고 시조는 고려신호대장군 휘 언이요 중조 득생의 9대손으로 국운이 날로 암울하던 서기 1888년 7월 5일에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서 고 휘 유인의 2남으로 태어났다. 모는 나주정씨이고 배는 해남 윤씨로 2남1녀를 산하다. 시운이 삭막하여 오직 향리에서 국학으로써 국치의 한을 달래더니 점차 인후광달한 천품이 출군하는지라 향인들이 두루 공을 말하여 비운의 동량이라 말했다. 때를 맞나 분연히 일어나 3.1운동에 투신하니 30세다. 이듬해 서기 1920년 4월 22일 우수영 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우수영영내를 향하여 들어오다 동교 훈도에게 발견되여 태극기를 빼앗기고 만세행진이 제지당하는 것을 보고 귀성유학생 양성용 동민 주영철 김종호 윤인섭 전유봉 최이규 주봉옥 박동수 박규성 이준섭등 동리 유지들이 나서서 연행된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한편 만세운동의 전개를 계획준비하여 서기 1920년 4월23일 오후 8시경 다수 주민들과 학생들이 선두리 선착장에 모여 태극기와 격문을 나누어 들고 독립만세를 연창하는 시위행진을 주동하였
다가 체포되었다. 이로써 공은 서기 1920년 5월 13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에서 징역1년을 언도받고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한 이래 30여년을 일제탄압과 형애의 수인이 되여 각고하시다. 60세에 광복하고 서기 1967년 11월 10일 향년 79세 영면하시니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서기 1983년 8월 30일 대통령표창 제5799호로 고의 충절과 위업을 천추만세에 길이 빛나게 하였다. 이제 국가보훈처의 힘을 입어 고토에 무사를 새기나니 이는 가내의 영광이며 무릇 대도를 수기이의한 공의 봉지를 기려 세세에 명감을 삼고자 함이니 후세는 이를 본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