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옥산리 산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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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강소 터에서 가까운 함평군 함평읍 옥산리 산 10-11 인동장씨 묘역 내 농민군 지도자 장경광 추념비를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암 장경광 장군의 동학농민혁명 추념비
장경광장군(1866~1922, 본명 상호, 호 경암, 30世)은 1894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하시어, 반제 반봉건 반부태의 혁명정신이 깃든 "大同世上"을 선언하셨는데, 조일연합군이 무력 진압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특별법에 의거하여 설치한 동 심의위원회에서 장군의 명예회복 신청은 수년간 조사와 심의를 거쳐 2009년 1월 제577호로 신원하고 유족 장병태외 68명을 등록했다.
장군은 1866병인년 부 鉉默 모 成岩(한양조씨)의 독자로 출생하셨다. 장군의 유년시절, 병인.신미 양요를 격퇴한 흥선대원군은 1871신미년 함평 주포 놀이터에 척화비를 세워 반외세 사상을 선무했는데, 조부(志衡, 28세)는 당시 한성부 좌윤(서울부시장)에 재임하셨다. 장군은 29세인 1894년 4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때 세운 함평집강소(혁명사령부) 서기(책임비서)를 맡아 혁명과업을 수행하셨고, 그해 9월 , 2차 봉기 때 제폭구민. 보국안민.척양척왜 사상을 선무하며 활약하시다가 긓 12월, 일본군까지 연합한 무력진압때 현상 수배되셨다. 장군은 조부모. 부모, 숙부모(鉉伯 29세).배우자 呂氏가 연좌제로 몰살당했는데, 문중 도유사를 맡고
장경광장군(1866~1922, 본명 상호, 호 경암, 30世)은 1894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하시어, 반제 반봉건 반부태의 혁명정신이 깃든 "大同世上"을 선언하셨는데, 조일연합군이 무력 진압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특별법에 의거하여 설치한 동 심의위원회에서 장군의 명예회복 신청은 수년간 조사와 심의를 거쳐 2009년 1월 제577호로 신원하고 유족 장병태외 68명을 등록했다.
장군은 1866병인년 부 鉉默 모 成岩(한양조씨)의 독자로 출생하셨다. 장군의 유년시절, 병인.신미 양요를 격퇴한 흥선대원군은 1871신미년 함평 주포 놀이터에 척화비를 세워 반외세 사상을 선무했는데, 조부(志衡, 28세)는 당시 한성부 좌윤(서울부시장)에 재임하셨다. 장군은 29세인 1894년 4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때 세운 함평집강소(혁명사령부) 서기(책임비서)를 맡아 혁명과업을 수행하셨고, 그해 9월 , 2차 봉기 때 제폭구민. 보국안민.척양척왜 사상을 선무하며 활약하시다가 긓 12월, 일본군까지 연합한 무력진압때 현상 수배되셨다. 장군은 조부모. 부모, 숙부모(鉉伯 29세).배우자 呂氏가 연좌제로 몰살당했는데, 문중 도유사를 맡고
경암 장경광 장군의 동학농민혁명 추념비
장경광장군(1866~1922, 본명 상호, 호 경암, 30世)은 1894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하시어, 반제 반봉건 반부태의 혁명정신이 깃든 '大同世上'을 선언하셨는데, 조일연합군이 무력 진압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특별법에 의거하여 설치한 동 심의위원회에서 장군의 명예회복 신청은 수년간 조사와 심의를 거쳐 2009년 1월 제577호로 신원하고 유족 장병태외 68명을 등록했다.
장군은 1866병인년 부 鉉默 모 成岩(한양조씨)의 독자로 출생하셨다. 장군의 유년시절, 병인.신미 양요를 격퇴한 흥선대원군은 1871신미년 함평 주포 놀이터에 척화비를 세워 반외세 사상을 선무했는데, 조부(志衡, 28세)는 당시 한성부 좌윤(서울부시장)에 재임하셨다. 장군은 29세인 1894년 4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때 세운 함평집강소(혁명사령부) 서기(책임비서)를 맡아 혁명과업을 수행하셨고, 그해 9월 , 2차 봉기 때 제폭구민. 보국안민.척양척왜 사상을 선무하며 활약하시다가 긓 12월, 일본군까지 연합한 무력진압때 현상 수배되셨다. 장군은 조부모. 부모, 숙부모(鉉伯 29세).배우자 呂氏가 연좌제로 몰살당했는데, 문중 도유사를 맡고
장경광장군(1866~1922, 본명 상호, 호 경암, 30世)은 1894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하시어, 반제 반봉건 반부태의 혁명정신이 깃든 '大同世上'을 선언하셨는데, 조일연합군이 무력 진압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특별법에 의거하여 설치한 동 심의위원회에서 장군의 명예회복 신청은 수년간 조사와 심의를 거쳐 2009년 1월 제577호로 신원하고 유족 장병태외 68명을 등록했다.
장군은 1866병인년 부 鉉默 모 成岩(한양조씨)의 독자로 출생하셨다. 장군의 유년시절, 병인.신미 양요를 격퇴한 흥선대원군은 1871신미년 함평 주포 놀이터에 척화비를 세워 반외세 사상을 선무했는데, 조부(志衡, 28세)는 당시 한성부 좌윤(서울부시장)에 재임하셨다. 장군은 29세인 1894년 4월,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때 세운 함평집강소(혁명사령부) 서기(책임비서)를 맡아 혁명과업을 수행하셨고, 그해 9월 , 2차 봉기 때 제폭구민. 보국안민.척양척왜 사상을 선무하며 활약하시다가 긓 12월, 일본군까지 연합한 무력진압때 현상 수배되셨다. 장군은 조부모. 부모, 숙부모(鉉伯 29세).배우자 呂氏가 연좌제로 몰살당했는데, 문중 도유사를 맡고
어업을 경영하시던 종조(志釬 28세)가 엄동설한 겨울밤 함평만에다 어선을 띄워, 종손인 장군을 해제로 피신시키고 보급과 연락을 맡으셨으며, 장군의 사촌들은 가문의 대가 끊이지 않도록 먼 종가로 출후시켜 누보하는등 마무리 짓고, 1915년 82세로 한 많은 천 수를 마치셨다. 그래서 사문중 시제는 증조부모. 숙부모도 같이 합사하여 우애심을 자자손손 기리고 있다.장군은 본명 상호를 경광으로 바꾸고, 해제 기룡동 죽산안씨 종가에 은거하시며 마름을 맡았는데, 나중에 그 집에서 장군을 맏사위로 맞이했다. 장군은 슬하에 4남3녀를 두셨고, 일제강점기였던 1922.7.15 향년 57세로 통한의 생애를 마치셨다.
學吉(1903-50, 學順(1906-82),學甫(1917-96) 네 아들은 이름에 모두 學자를 붙여주신 장군의 호학정신을 받들어 주경야독하며 면학했다. 광복 후 1948년에애 아들들이 족보를 복원할때 혁명정신을 기리며 선략장군으로 신원했다. 한국전쟁 때, 종손 병태가 의용대인 우국동지회장을 맡은 일로, 좌익빨치산들이 자행했던 이른바 인민재판에서 병태의 지계존비속들이 몰살당했다. 그 아수라장에 學順이 '나도 같이 죽여라'하며 뛰어들었고, 빨치산들은 '그래 너는 누구냐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아느냐'하며 결박했다. 그 절체정명순간 韓吉이 '여기 學順,學用,學甫는 모두 장군의 다을로 내 동생이지만, 병태직계는 아니니 풀어주오'하고, '동생들이 살아남아야 집안 뒤처리를 맡을 것 아니나'하며 밀어냈다. 그러나 부모형제 조카들 학살장면을 지켜보고도 결박당해서 같이 죽지 못했는데, 결박만 미리 풀렸다면 하나라도 죽여 보복한 후, 도리강변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한다. 그랬으니 남은 3형제의 우애심이 어찌 예사로웠으랴. 이 추념비는 문중 4대소가에서 150만원씩 출연하여 근립했다.
學吉(1903-50, 學順(1906-82),學甫(1917-96) 네 아들은 이름에 모두 學자를 붙여주신 장군의 호학정신을 받들어 주경야독하며 면학했다. 광복 후 1948년에애 아들들이 족보를 복원할때 혁명정신을 기리며 선략장군으로 신원했다. 한국전쟁 때, 종손 병태가 의용대인 우국동지회장을 맡은 일로, 좌익빨치산들이 자행했던 이른바 인민재판에서 병태의 지계존비속들이 몰살당했다. 그 아수라장에 學順이 '나도 같이 죽여라'하며 뛰어들었고, 빨치산들은 '그래 너는 누구냐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아느냐'하며 결박했다. 그 절체정명순간 韓吉이 '여기 學順,學用,學甫는 모두 장군의 다을로 내 동생이지만, 병태직계는 아니니 풀어주오'하고, '동생들이 살아남아야 집안 뒤처리를 맡을 것 아니나'하며 밀어냈다. 그러나 부모형제 조카들 학살장면을 지켜보고도 결박당해서 같이 죽지 못했는데, 결박만 미리 풀렸다면 하나라도 죽여 보복한 후, 도리강변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한다. 그랬으니 남은 3형제의 우애심이 어찌 예사로웠으랴. 이 추념비는 문중 4대소가에서 150만원씩 출연하여 근립했다.
함평군 함평읍 옥산리 산 10-11 인동장씨 묘역 내 농민군 지도자 장경광 추념비를 찾았다.
경암 장경광 장군의 동학농민혁명 추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