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집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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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옥산리 3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함평군 함평읍 옥산리 321 인동장씨 사당 경모재 함평집강소 터를 찾았다.
동학농민혁명 함평집강소 터 안내판
위 경모재는 가선대부 호조참판(기재부차관) 인동장공 두갑(1694~1775)의 사우다. 위의 사진은 1990년에 촬영한 경모재 원형이다.
동학농민혁명 함평집강소 터
1914년 호남선 철길개통 전에 구한말까지는 고려개경이나 조선한양에서 이곳 함평 광주 이남을 오가려면 당시에는 항, 포구 뱃길이 유일한 조운로였다. 그렇게 함평만으로 입출항하는 길손과 화물을 실어 나르던 수레와 인마들도 모두 여기 앞길 주포로를 이용했다. 그래서 병인, 신미양요를 이긴 흥선대원군도 여기 주포해안에대 척화비를 세웠던 것이다. 지금 그 척화비는 함평군청으로 옮겼다. 주포는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지명에다 술주(酒)자를 썼는데, 주포가 옛날에는 술도가로 유명한 전국적 물류포구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지금이야 술이 값싸지만, 옛날에는 술은 쌀로만 빚었기 때문에 아주 비싸고 귀한 음료였다. 일제가 쌀 공출을 늘리기 위해서 쌀로 빚는 일을 단속하고, 대신에 값싼 희석식소주를 들여온 후로 알코올중독이란 병도 생겼다.

참찬공 장백림(6세)께서는 1150년 과거에 급제하셨고 1170년에 고려무신정변 후에도 우참찬(부총리)을 역임하시다 40년간 관직을 끝으로 1190년 무신정권에 의해 진도로 유배되셨다. 1193년경 복직되어 개경으로 올라가시다가 주포에서 내리셨고 양림 마을에 입향하셨다. 참찬공 장백림(6세꼐서는 양림에 정착하여 참찬공파 파조가 되셨고, 후학들도 양성하셨다. 6세 百林(백림)의 원모사에 이은 21세 宇翰(우한)의 충효사, 23세 南驥(남기)의 양림사는 모두 흥선대원군이 서울 철폐할 때 훼털되었고, 여기 24세 두갑의 경모재만 사우로 지었기 때문에 유지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때 함평읍내에서 집강소를 짓기로 하고 1894 6월경 임시로 여기 경모재에데 함평집강소를 설치했는데 그해 연말 동학농민혁명이 유혈진압되면서 집강소도 폐쇄되었다. 그후에는 예비군훈련장으로 할양된 것을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