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90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기미 3.1 의거 열사기념비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물 제53-1-5호] 관리자:함평군수 /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906번지 함평공원 내
이 비는 1920년 3월 26일 이 곳 함평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3년 건립한 비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함평에서도 4월 26일 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를 경험삼아 1920년 3.1독립만세운동 1주년이 되자 조사현, 송태호, 정기연 등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26일 함평공립보통학교 졸업식날을 기해 보통학교 생도들과 청년, 군민들 수 백명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10여명의 군중이 부상을 입었으며, 주동자 20여명이 구속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세운동은 전 군(郡)으로 퍼지게 되었다. 함평군에서는 그 날의 의의를 되새기고자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이 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이 비는 1920년 3월 26일 이 곳 함평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3년 건립한 비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함평에서도 4월 26일 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를 경험삼아 1920년 3.1독립만세운동 1주년이 되자 조사현, 송태호, 정기연 등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26일 함평공립보통학교 졸업식날을 기해 보통학교 생도들과 청년, 군민들 수 백명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10여명의 군중이 부상을 입었으며, 주동자 20여명이 구속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세운동은 전 군(郡)으로 퍼지게 되었다. 함평군에서는 그 날의 의의를 되새기고자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이 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겨레여 자유의 상징인 이 비를 보라
생명보다 귀중한 자유의 상징을
忍苦(인고) 딛고 일어선 산 호흡이여
억압을 가르고 사선을 넘어선 쟁취의 맥박이여
그대 자유의 여신 독립의 포로
아! 어이 잊으랴 함평군의 열사들을
기미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 독립운동에 참석한 학생 및 유생들 수 명이 본군에 귀향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같은해 3월 26일, 함경보통학교 졸입식 후 거사를 이르켰다. 선두에 선 열사를 따라 보통학교 생도와 군민이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손에 태극기를 들고 함평경찰서를 포위 일본 경찰 및 헌병들의 총칼에 맨손으로 항쟁 하였으니 울분에 찬 가슴들이 뿌린 한의 피가 얼마던가.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하여 희생당한 십 여명의 사상자와 군민들의 피 맺힌 분노의 불길은 전군적으로 퍼지게 되었으니 신광 대동 해보 월야 주재소를 교란 시키고 문장 나산 학교역과 손불 엄다 소재지에서 반일구호의 행진과 밤이면 봉화 투쟁이 계속되었다. 손불면 백초동 부락에 신정교를 설립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일제 무단정치에 항거하다 폐교 당했고 군 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 이 민족에 독립의 날을 달라고 끝까지 왜치던 열사들은 악랄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옥사 혹은 출옥 후 병사하여 민족 제단 앞에 생명을 바치었다. 이제 열사들의 피뿌린 희생으로 서기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이해 나라를 세웠으니 이분들의 거사야말로 역사에 길이 빛날 공적이 되었도다. 애정 어린 열사들이여. 민족독립을 염원하던 영혼들이여. 거룩한 풍의 길이 빛나소서.
생명보다 귀중한 자유의 상징을
忍苦(인고) 딛고 일어선 산 호흡이여
억압을 가르고 사선을 넘어선 쟁취의 맥박이여
그대 자유의 여신 독립의 포로
아! 어이 잊으랴 함평군의 열사들을
기미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 독립운동에 참석한 학생 및 유생들 수 명이 본군에 귀향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같은해 3월 26일, 함경보통학교 졸입식 후 거사를 이르켰다. 선두에 선 열사를 따라 보통학교 생도와 군민이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손에 태극기를 들고 함평경찰서를 포위 일본 경찰 및 헌병들의 총칼에 맨손으로 항쟁 하였으니 울분에 찬 가슴들이 뿌린 한의 피가 얼마던가.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하여 희생당한 십 여명의 사상자와 군민들의 피 맺힌 분노의 불길은 전군적으로 퍼지게 되었으니 신광 대동 해보 월야 주재소를 교란 시키고 문장 나산 학교역과 손불 엄다 소재지에서 반일구호의 행진과 밤이면 봉화 투쟁이 계속되었다. 손불면 백초동 부락에 신정교를 설립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일제 무단정치에 항거하다 폐교 당했고 군 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 이 민족에 독립의 날을 달라고 끝까지 왜치던 열사들은 악랄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옥사 혹은 출옥 후 병사하여 민족 제단 앞에 생명을 바치었다. 이제 열사들의 피뿌린 희생으로 서기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이해 나라를 세웠으니 이분들의 거사야말로 역사에 길이 빛날 공적이 되었도다. 애정 어린 열사들이여. 민족독립을 염원하던 영혼들이여. 거룩한 풍의 길이 빛나소서.
GPS상의 주소는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산907이다.
함평군 기미 3.1의거 열사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