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월계리 산35-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樂英齋(낙영재)
문장장터 독립만세 현장
기미년 4월 8일 오후2시 문장장터에서 애국지사 24인이 선봉에 서서 나라사랑, 자주독립 높은 뜻을 일깨우고, 수백명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민족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독립쟁취 저항운동으로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만세소리 진동했다.
기미년 4월 8일 오후2시 문장장터에서 애국지사 24인이 선봉에 서서 나라사랑, 자주독립 높은 뜻을 일깨우고, 수백명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민족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독립쟁취 저항운동으로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만세소리 진동했다.
4.8 독립만세 사전결의
폭압적 일제 무단정치에 저항한 최초의 지역유림 문장장터 4.8 만세운동은, 독립쟁취라는 민족의 염원을 달성키 위해 그때 낙영재에서 태극기 1,600개와 격문을 제작한 사전결의 얼과 넋을 기려 조성되었다.
폭압적 일제 무단정치에 저항한 최초의 지역유림 문장장터 4.8 만세운동은, 독립쟁취라는 민족의 염원을 달성키 위해 그때 낙영재에서 태극기 1,600개와 격문을 제작한 사전결의 얼과 넋을 기려 조성되었다.
애국지사 24인
이인행 이윤상 김기택 장효섭 정재남 정재식 정용섭 장영안 모재명 김여옥 이양범 이상준 장덕환 장태중 이계동 김용현 김재곤 최준달 모양춘 민정태 이인덕 김원춘 주승환 윤의병
모재영은 모재명의 잘못된 오기이다.
이인행 이윤상 김기택 장효섭 정재남 정재식 정용섭 장영안 모재명 김여옥 이양범 이상준 장덕환 장태중 이계동 김용현 김재곤 최준달 모양춘 민정태 이인덕 김원춘 주승환 윤의병
모재영은 모재명의 잘못된 오기이다.
三一 萬歲 記念塔(3.1 만세 기념탑)
겨레여 자유의 상징인 이 탑을 보라. 생명보다 중한 겨레의 맥박이여. 그대 자주 독립의 혼. 아! 어이 잊으리. 함평의 우국 열사들을
이인행 이윤상 김기택 장효섭 정재남 정재식 정용섭 장영안 모재명 김여옥 이양범 이상준 장덕환 장태중 이계동 김용현 김재곤 최준달 모양춘 민정태 이인덕 김원춘 주승환 윤의병
이인행 이윤상 김기택 장효섭 정재남 정재식 정용섭 장영안 모재명 김여옥 이양범 이상준 장덕환 장태중 이계동 김용현 김재곤 최준달 모양춘 민정태 이인덕 김원춘 주승환 윤의병
전남 함평군 월야면 월계리 산35-1 낙영재
樂英齋(낙영재) - 관리번호 : 53-1-15 / 관리자 : 함평군
낙영재는 석천 김중수 선생의 한문서당으로 문하생 김기택 등 16명이 만세운동 거사를 모의하였던 곳으로 1943년 태풍으로 붕괴되어 주민들의 자력으로 복구하고자 하였으나, 반일 거점지역이라 하여 일본 경찰의 방해로 복구하지 못하다가 1989년 4월 8일 4.8 독립운동만세 발상지 기념비를 건립하고 2005년 4월 7일 낙영재 복원사업을 완공하였다.
이곳을 찾아주신 분들께서는 독립운동을 위해 애쓰신 선조들을 기리며,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선진 군민의식으로 주변 청결에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낙영재는 석천 김중수 선생의 한문서당으로 문하생 김기택 등 16명이 만세운동 거사를 모의하였던 곳으로 1943년 태풍으로 붕괴되어 주민들의 자력으로 복구하고자 하였으나, 반일 거점지역이라 하여 일본 경찰의 방해로 복구하지 못하다가 1989년 4월 8일 4.8 독립운동만세 발상지 기념비를 건립하고 2005년 4월 7일 낙영재 복원사업을 완공하였다.
이곳을 찾아주신 분들께서는 독립운동을 위해 애쓰신 선조들을 기리며,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선진 군민의식으로 주변 청결에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낙영재 복원 실기
낙영재는 원래 석계촌 후에 있었으며 후진들의 훈학을 위하여 참봉 김재욱 공을 위시로 온 주민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건립한 서당이며 한학의 기초와 작시 및 구문법을 익히고 나아가서 성현의 도를 탐구하였고 또한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걱정하고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토론하는 등 애국심의 배양에도 힘썼으니 낙영제는 선비정신과 애국심이 투철한 인재를 육성하는 도장으로 자리잡아갔으며 이 소문이 퍼지자 찾아오는 학동이나 유생이 많아졌다. 기미 3.1 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그 소식이 전해지자 낙영재의 유생들도 3.1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김기택 공을 비롯한 유생 24인이 모의하고 군중동원에 총력을 다하여 1919년 4월 8일 문장에서 거사하니 참여한 인원이 2천을 넘었고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일경들도 간담이 서늘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으며 일헌병 및 일경에게 굽히지 않고 싸웠으니 이 운동이 전남지방에서는 가장 빛난 항일운동인 4.8 문장만세운동이다.
낙영재는 원래 석계촌 후에 있었으며 후진들의 훈학을 위하여 참봉 김재욱 공을 위시로 온 주민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건립한 서당이며 한학의 기초와 작시 및 구문법을 익히고 나아가서 성현의 도를 탐구하였고 또한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걱정하고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토론하는 등 애국심의 배양에도 힘썼으니 낙영제는 선비정신과 애국심이 투철한 인재를 육성하는 도장으로 자리잡아갔으며 이 소문이 퍼지자 찾아오는 학동이나 유생이 많아졌다. 기미 3.1 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그 소식이 전해지자 낙영재의 유생들도 3.1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김기택 공을 비롯한 유생 24인이 모의하고 군중동원에 총력을 다하여 1919년 4월 8일 문장에서 거사하니 참여한 인원이 2천을 넘었고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일경들도 간담이 서늘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으며 일헌병 및 일경에게 굽히지 않고 싸웠으니 이 운동이 전남지방에서는 가장 빛난 항일운동인 4.8 문장만세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