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계천리 310-18
- 탐방로그
- 이 공적비는 나라의 안위를 위해 힘쓴 장경삼, 장옥삼, 장공삼 세 형제의 공을 길이 전하고자 1996년 4월에 건립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동학농민 초명 지도자 장경삼 장옥삼 장공삼 선생 공적비
동학농민 혁명군 지도자 장경삼 옥삼 공삼 선생 공적비문
세 분께서는 함평군 신광면 계천리 사천마을에서 아버지 대만님과 어머니 금성김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흥성이다. 세 분의 조상으로 역사에 이름있는 분은 2세조인 연우공이 계신데 고려현종때 거란의 침입을 당하여 임금을 모시고 나주로 피난한 공이 있으며 호부상서를 역임하셨다. 그리고 10대조인 이길공은 7개 고을의 수령과 사간원 대사간 및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셨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조헌 의병장을 도와 사직을 받든 공으로 이조참판을 역임하셨으며 이 지방에 은거하셨다. 경삼 옥삼 선생은 과거에 뜻을 두고 서울에 올라가 활동하시다가 민씨 척족정권의 세도가 극에 달해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탐관오리가 날뛰었으며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이 노골화하여 세상이 혼탁해짐을 보고 벼슬길을 단념하셨다. 경삼 옥삼 공삼 삼형제분은 고향에서 학문을 닦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관심이 깊었으며 후진양성과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안팎으로 나라가 위태롭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1894년에 호남인들이 앞장서서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이룩하고자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켜 전라도 전역을 휩쓸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다. 이때 옥삼 선생은 큰 뜻을 품고 있던 차 처조카로 함평의 대접주인 이화진의 권유를 받아 형인 경삼 선생 그리고 동생 공삼 선생과 함께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여는 혁명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덕망과 신임이 두터우신 세 분이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가 되시니 주위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참여하여 괴치 마을 앞들에 모여 군사훈련을 하였으므로 지금도 이곳을 삼정들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삼형제 장씨가 동학 농민군을 훈련시킨 곳이라는 뜻이다. 세분이 거느린 동학 농민군은 일제 침략군이 주축이 된 관군의 토벌작전에 대항하여 염산 고막원 무안 싸움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경삼 선생은 체포되여 12월 9
세 분께서는 함평군 신광면 계천리 사천마을에서 아버지 대만님과 어머니 금성김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흥성이다. 세 분의 조상으로 역사에 이름있는 분은 2세조인 연우공이 계신데 고려현종때 거란의 침입을 당하여 임금을 모시고 나주로 피난한 공이 있으며 호부상서를 역임하셨다. 그리고 10대조인 이길공은 7개 고을의 수령과 사간원 대사간 및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셨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조헌 의병장을 도와 사직을 받든 공으로 이조참판을 역임하셨으며 이 지방에 은거하셨다. 경삼 옥삼 선생은 과거에 뜻을 두고 서울에 올라가 활동하시다가 민씨 척족정권의 세도가 극에 달해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탐관오리가 날뛰었으며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이 노골화하여 세상이 혼탁해짐을 보고 벼슬길을 단념하셨다. 경삼 옥삼 공삼 삼형제분은 고향에서 학문을 닦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관심이 깊었으며 후진양성과 지역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안팎으로 나라가 위태롭고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1894년에 호남인들이 앞장서서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이룩하고자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켜 전라도 전역을 휩쓸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다. 이때 옥삼 선생은 큰 뜻을 품고 있던 차 처조카로 함평의 대접주인 이화진의 권유를 받아 형인 경삼 선생 그리고 동생 공삼 선생과 함께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여는 혁명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덕망과 신임이 두터우신 세 분이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가 되시니 주위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참여하여 괴치 마을 앞들에 모여 군사훈련을 하였으므로 지금도 이곳을 삼정들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삼형제 장씨가 동학 농민군을 훈련시킨 곳이라는 뜻이다. 세분이 거느린 동학 농민군은 일제 침략군이 주축이 된 관군의 토벌작전에 대항하여 염산 고막원 무안 싸움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경삼 선생은 체포되여 12월 9
일에 옥삼 선생과 공삼 선생은 뒤에 붙잡혀 다음해 2월 17일에 함평에서 각각 처형되어 일생을 마치셨다. 선각자이신 삼형제분이 이룩하려던 이 나라의 민주화는 바로 갑오경장을 통해 어느 정도 서우치되어 수천년간 지탱해 오던 봉건체제가 무너졌으며 반외세의 자주독립정신은 그뒤 더욱 악랄하게 계속되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는 항일독립투쟁의 그본이 되었다. 세분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생명과 재산을 바쳐 이 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며 외세를 물리치려던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나라 근대사의 서막이요 이후 계속되는 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세분과 선각자들이 바친 고귀한 희생은 이 나라 역사발전의 밑거름이 되셨다. 삼형제분이 순국하신 후 가산은 몰수되었고 후손들은 몸을 피하여 유랑하였으며 가옥은 헐리어 함평관아의 아사를 지었고 유족들의 고통과 수난은 엄청났다. 경삼 선생의 아들로 현순 등 6형제가 있고 옥삼 선생의 아들로 현구 등 3형제가 있으며 공삼 선생의 아들로 현숙 등 3형제가 있고 세 분의 손자로 익수 일수 난수 백수 기수 등 15명이 있으며 증손으로 원승 원봉 원오 원제 원용 원석 원회 원국 원동 원? 등 많은 후손들이 경향에 살고 있는데 특히 원석씨는 광주 전남 동학농민혁명 유족회의 책임을 맡아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동학농민혁명에 몸 바친 선조들의 뜻을 기리고 계승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분이시다. 우리 모두는 세분 선각자들의 뜻을 받들고 역사발전에 헌신하신 정신을 이어받아 역사를 빛내고 나라와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번영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하는 뜻으로 세분의 공적을 새기고 기리는 바입니다.
동학농민혁명군 지도다 장경삼 옥삼 공삼 선생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 /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학박사 이상식 지음 이병헌 씀 나상옥 조각 / 1996년 4월 일
동학농민혁명군 지도다 장경삼 옥삼 공삼 선생 공적비 건립추진위원회 /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문학박사 이상식 지음 이병헌 씀 나상옥 조각 / 1996년 4월 일
GPS상의 주소는 전남 함평군 신광면 계천리 310-18 계천삼거리이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장경삼 장옥삼 장공삼 선생 공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