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자금헌성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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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 379-3
탐방로그
이 기념탑은 당초 동학혁명기념탑 부근에 건립하려 했지만, 유족들의 뜻에 따라 독립자금의 최초 모금처였고 시발지였던 회진면 신상리에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자금헌성기념탑
독립자금헌성기념탑
1910년 경술년 국치는 우리민족의 큰 수난인 동시에 삼천리 방방곡곡에 의병의 봉기와 해외망명 결사들의 목숨을 건 헌신으로 세계만방에 민족자존의 혼을 심어 주었다. 독립운동 영도자 손병희 선생의 강력한 영도 아래 전국 각지에서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 파리 강화회의, 연해주 독립군 등 각처에 전달되었으며, 의암성사(손병희 선생)의 유지에 따라 본 은.동장 훈장은 표창장인 동시에 먼저 독립자금을 헌납한 후 포덕 57년(1917년) 대훈장을 발급하였고 후에 교부하는 식으로 특신 교인에게 증장하였다. 모급된 자금은 남자교인은 감시가 심하여 내소부인이 전달하였으며 이는 애국충정에 불탄 결사대였다.

- 독립자금 헌성 기념탑 유족회 일동 -
선인들의 찬연한 혼을 기리는 비
지나가는 나그네여 발을 멈추고 우리 선인들의 꼿꼿한 발걸음을 읽으십시오. 하늘로부터 열린 태극의 길(道)은 땅과 바다로 명덕(옛 덕도) 사람들의 가슴으로 흘러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착취, 그 무지막지한 총칼의 세월 혀를 깨물면서 보릿고개 배고픔 속에서도 허리띠 졸라매고 한 줌 두 줌 좀도리 쌀을 모으고 논밭을 팔고 눈물로 마련한 금반지 은반지를 빼고 고추알바람 속에서 건진 김 한 속 두 속 모아 상해로 보냈습니다. 그 가시밭 헤치고 나아간 우리 선인들의 발걸음을 영원히 기리고 청사에 남기고자 후손들은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 이 조그마한 돌을 놓습니다.
탑문

서기 1894년의 동학혁명 정의의 민족운동은 지배자와 가진 자 중심의 잘못된 국가사회속에서 올바르게 살려는 천도교 참정신에서 그 고장 회진 신상리를 중심으로 선대들은 그 당시 침략자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가면서 생명의 핏줄인 재산과 전답을 팔아 민족자주독립운동의 모금운동에 진정 헌신하시었다. 지금에 사는 후손들은 때 늦은 감을 극히 죄송하게 여기면서 그 당시 선대들의 존함을 새겨 이 나라 민족사에 보태드리옵니다.
전남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 신상마을 입구
신상마을. 1130년경 제주고씨가 마을 북편(공터)에 터를 닦았으나 성촌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살았다는 흔적으로 고초등의 지명이 있으나 기록은 없고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1600년경 경주 김씨 홍철이 용산면에서 입촌하여 마을 이름을 잿몰이라고 지명하고 생활해오다 인천이씨, 김해김씨, 광산김씨, 수원백씨가 입촌하니 신상리로 개칭했다. 그 후 밀양박씨, 남양홍씨, 수성최씨가 입촌하였고 1960년 산업화 농경산업으로 관덕 농장이 조성되니 광산노씨, 평택임씨, 장수황씨가 입촌하여 농.수산업을 주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역사적 인물은 1920년 김덕호, 김상동, 김영익이 천도교에 입교하여 이고장 주민들에게 문맹을 퇴치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1927년 독립자금 모금운동에 전 주민이 참여하여 금,은,동,장으로 생활환경에 따라 헌성하였으니 이고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라 말할 수 있다... 후략...
전남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 379-3 마을입구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