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손양면 가평리 산21
- 탐방로그
- 독립운동가 함홍기 열사의 묘소는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가평리 산21에 위치하고 있다. 함홍기 선생은 양양군 손양면 가평리에서 출생하여 1919년 24세의 나이에 손양면 가평리 구장으로서 전 구장 신세목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고, 1919년 4월 1일 양양군 각 면 책임자들이 양양읍 임천리 이교환의 집에 모여 4월 4일 양양 장날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으나 모의 사실이 발각되어 4월 3일 주모자 급들이 체포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공 성 함씨 휘 홍기 자 대갑이니 정평공 휘 전림의 후라 고조 휘 치현 증조 휘 정규 조 휘 락영 고 휘 병일 비 강릉김씨라 공은 생이위인이 비범하여 장래가 기대되더니 기미3.1독립운동지시를 당하여 만세소리가 처처에 봉기하였다. 공도 향인과 같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경찰서에 직입하여 일인 서장에게 구속청년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일언 거절당하였다.
이에 격분한 공은 즉시 화로를 서장 면전에 던지자 일본인 두 순경이 군도로 난자하여 지체가 분단하여 영영 인하 혼이 되고 말았으니 향년 25세라 아! 슬프다 말하자면 목이 메이고 생각하면 가슴이 터지는 듯 하도다. 시운이 불리하여 공의 웅지를 비록 당일에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첫쨰로 교활한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둘쨰로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환기하였으니 그 공을 어찌 다 측량하리요.
8.15 광복 후 정부의 표창장을 받았고 향인이 추모비를 건립하였으니 공의 대의가 다시 천추에 빛나도다 금번 원호처의 협조로 다시 비를 건립함은 공의 충의의 소치라 하겠다. 공의 생질 김종만보가 나를 조양우거에 내방하여 비문을 촉탁하므로 졸문을 불구하고 평일 들은 바 공의 행적과 세계를 약기하여 그 전말을 서술하노라.
배 경주 김씨 신묘7월 10일생 임진 11월12일 졸 묘부라. 후략.
이에 격분한 공은 즉시 화로를 서장 면전에 던지자 일본인 두 순경이 군도로 난자하여 지체가 분단하여 영영 인하 혼이 되고 말았으니 향년 25세라 아! 슬프다 말하자면 목이 메이고 생각하면 가슴이 터지는 듯 하도다. 시운이 불리하여 공의 웅지를 비록 당일에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첫쨰로 교활한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둘쨰로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환기하였으니 그 공을 어찌 다 측량하리요.
8.15 광복 후 정부의 표창장을 받았고 향인이 추모비를 건립하였으니 공의 대의가 다시 천추에 빛나도다 금번 원호처의 협조로 다시 비를 건립함은 공의 충의의 소치라 하겠다. 공의 생질 김종만보가 나를 조양우거에 내방하여 비문을 촉탁하므로 졸문을 불구하고 평일 들은 바 공의 행적과 세계를 약기하여 그 전말을 서술하노라.
배 경주 김씨 신묘7월 10일생 임진 11월12일 졸 묘부라. 후략.
독립운동가 함홍기 열사
독립운동가 함홍기 열사
함홍기(咸鴻基 1895.3 ~ 1919.4.4)
양양군 손양면 가평리에서 출생하여 1919년 24세의 나이에 손양면 가평리 구장으로서 전 구장 신세목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4월 1일 양양군 각 면 책임자들이 양양읍 임천리 이교환의 집에 모여 4월 4일 양양 장날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으나 모의 사실이 발각되어 4월 3일 주모자 급들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만세 운동은 계획대로 실행에 들어갔고 함홍기 열사는 4월 4일 손양면 주민들을 선도하여 양양 장터로 들어가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군중을 인솔하여 경찰서로 달려갔다. 만세 군중이 경찰서 마당을 가득 채운 가운데 주도자 몇 명이 경찰서장에게 전날 체포된 주모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자 함홍기 열사는 화로를 들어 경찰서장에게 덤벼 들던 중 옆에 있던 왜경의 칼에 양팔이 잘렸다.
그는 피를 흘리며 넘어진 후에도 경찰서장을 꾸짖다가 끝내 목을 찔려 순국하였다. 경찰서 복도에 가마니로 덮어놓았던 그의 시신은 열흘이나 지나 가족에게 인도되었으며 일본경찰은 장례식 때에도 관을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함홍기(咸鴻基 1895.3 ~ 1919.4.4)
양양군 손양면 가평리에서 출생하여 1919년 24세의 나이에 손양면 가평리 구장으로서 전 구장 신세목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4월 1일 양양군 각 면 책임자들이 양양읍 임천리 이교환의 집에 모여 4월 4일 양양 장날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으나 모의 사실이 발각되어 4월 3일 주모자 급들이 체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만세 운동은 계획대로 실행에 들어갔고 함홍기 열사는 4월 4일 손양면 주민들을 선도하여 양양 장터로 들어가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군중을 인솔하여 경찰서로 달려갔다. 만세 군중이 경찰서 마당을 가득 채운 가운데 주도자 몇 명이 경찰서장에게 전날 체포된 주모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자 함홍기 열사는 화로를 들어 경찰서장에게 덤벼 들던 중 옆에 있던 왜경의 칼에 양팔이 잘렸다.
그는 피를 흘리며 넘어진 후에도 경찰서장을 꾸짖다가 끝내 목을 찔려 순국하였다. 경찰서 복도에 가마니로 덮어놓았던 그의 시신은 열흘이나 지나 가족에게 인도되었으며 일본경찰은 장례식 때에도 관을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三一獨立運動烈士咸鴻基碑儒人慶州金氏
삼일독립운동열사 함홍기비 유인 경주김씨
삼일독립운동열사 함홍기비 유인 경주김씨
三一獨立運動烈士咸鴻基碑儒人慶州金氏
삼일독립운동열사 함홍기비 유인 경주김씨
삼일독립운동열사 함홍기비 유인 경주김씨
공 성 함씨 휘 홍기 자 대갑이니 정평공 휘 전림의 후라 고조 휘 치현 증조 휘 정규 조 휘 락영 고 휘 병일 비 강릉김씨라 공은 생이위인이 비범하여 장래가 기대되더니 기미3.1독립운동지시를 당하여 만세소리가 처처에 봉기하였다. 공도 향인과 같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경찰서에 직입하여 일인 서장에게 구속청년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일언 거절당하였다.
이에 격분한 공은 즉시 화로를 서장 면전에 던지자 일본인 두 순경이 군도로 난자하여 지체가 분단하여 영영 인하 혼이 되고 말았으니 향년 25세라 아! 슬프다 말하자면 목이 메이고 생각하면 가슴이 터지는 듯 하도다. 시운이 불리하여 공의 웅지를 비록 당일에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첫쨰로 교활한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둘쨰로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환기하였으니 그 공을 어찌 다 측량하리요.
8.15 광복 후 정부의 표창장을 받았고 향인이 추모비를 건립하였으니 공의 대의가 다시 천추에 빛나도다 금번 원호처의 협조로 다시 비를 건립함은 공의 충의의 소치라 하겠다. 공의 생질 김종만보가 나를 조양우거에 내방하여 비문을 촉탁하므로 졸문을 불구하고 평일 들은 바 공의 행적과 세계를 약기하여 그 전말을 서술하노라.
배 경주 김씨 신묘7월 10일생 임진 11월12일 졸 묘부라. 후략.
이에 격분한 공은 즉시 화로를 서장 면전에 던지자 일본인 두 순경이 군도로 난자하여 지체가 분단하여 영영 인하 혼이 되고 말았으니 향년 25세라 아! 슬프다 말하자면 목이 메이고 생각하면 가슴이 터지는 듯 하도다. 시운이 불리하여 공의 웅지를 비록 당일에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첫쨰로 교활한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둘쨰로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환기하였으니 그 공을 어찌 다 측량하리요.
8.15 광복 후 정부의 표창장을 받았고 향인이 추모비를 건립하였으니 공의 대의가 다시 천추에 빛나도다 금번 원호처의 협조로 다시 비를 건립함은 공의 충의의 소치라 하겠다. 공의 생질 김종만보가 나를 조양우거에 내방하여 비문을 촉탁하므로 졸문을 불구하고 평일 들은 바 공의 행적과 세계를 약기하여 그 전말을 서술하노라.
배 경주 김씨 신묘7월 10일생 임진 11월12일 졸 묘부라.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