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산200-1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省齋 奇參衍(성재 기삼연)
성재 기삼연(1851~1908)대장은 철종2년(1851)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에서 태어나 호남의 거유이자 위정척사 사상의 태두인 노사 기정진(1798~1879)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종32년(1895)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 단발령 시행후 1896년 토적복수를 내걸고 장성에서 300여명의 의병을 모아 광주의 기우만, 고광순과 합세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정부의 권유로 기우만이 의병부대를 해산을 명령하자 축령산에 은거하던 중 관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을사조약(1905), 정미조약(1907)이 체결되자 1907년 호남지역 의병부대를 규합 수연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 결성, 고창 문수산, 영광 법성포, 장성 오동촌, 백양사 전투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장성, 담양, 나주, 함평, 광주등지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 담양 추원(금성)산성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후퇴하던중 순창에서 체포되어 1908년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58세를 순국하였다. 정부는 기삼연대장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1966년 장성공원에 '호남창의영수 성재 기삼연선생 순국비'를 세웠다. 또한 국가보훈처에서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신 기삼연선생을 201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하였다.
湖南倡義領袖奇參衍先生殉國碑(호남 창의령수 기삼연 선생 순국비)
湖南倡義領袖奇參衍先生殉國碑(호남 창의령수 기삼연 선생 순국비)
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 우리나라에 가해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정책과 이에 따른 여러가지 흉모 만행은 진실로 근대 세계사에서 그 유례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1895년 을미에 연출된 국모시해의 참변과 1905년 을사에 강박당한 5조약의 체결과 1907년 정미에 자행한 황제의 폐립과 소위 7조약의 조인과 군대해산 등등의 모든 중대사건은 그 어느 것이고 강폭한 일제의 야욕과 농간에서 추진되고 조작되지 않은것이 없었다. 여기에 유구한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지켜온 우리 민족으로 어찌 이러한 망국의 위기와 치욕을 그대로 좌시 묵과만 할수있을것이냐 일찌기 왕조정치에 참여하여 국은을 받아온 지배층 중에서 후회막급의 통한과 울분에서 자결 순국한 이도 있었고 주권과 국토의 방위를 본연의 임무로 삼아온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결사항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도 좀더 엄숙하고 위대한 사실은 자신의 생활을 오로지 고도의 학문과 진리의 탐구에만 전심전력해오던 재야의 포의한사가 투필 궐기하여 항일구국의 인의앞에 동지와 제자들을 이끌고 분전사투하다가 드디어 생명을 홍모처럼 바쳣던 사실이니 우리들은 당시 호남창의영수 성재 기삼연 선생의 숭고한 생애와 존속에서 그 대표적인 모습을 우러러 되새겨 볼 수 있다. 선생꼐서는 삼한명족인 행주기씨 진사 봉진공의 제4남으로 1851년 정월 18일 호남 장성에서 탄생한바 유시부터 웅위과감한 기품과 고매불굴한 성격이 세인의 이목을 이끌었다. 근세 유학의 거성인 재종숙 노사 기정진선생의 애중히 여기는 교도를 받아 일목백행의 총혜로 경사와 병서에 정통하고 문필과 필법이 절묘하였으나 벼슬사리로 자신의 영화를 구하지도 않고 수난의 조국을 위해 지기상통하는 의사들과 항시 교유하여왔다. 을미8월에 국모시해의 참변이 돌발하자 선생은 드디어 송사 기우만 녹천 고광순등으로 더불어 토왜복수의 의병을 이르켜 군무를 자담하고 3백의 장성건아들을 모아 광주까지 진군회맹하여 크게 성세를 떨치고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맹주가 왕사 신기선의 선유(宣諭)를 드러 파병해산하게 되니 선생은 이것이 무슨왕명일것이냐 분개하고 다시 충의지사를 규합하여 재거하려다가 전주군영에 체포되어 한성 평리원으로 압송된 다음 한때의 옥고만을 치렀다. 그후 1904년에 로일전쟁이 터지고 그 결과 을사5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주권의 일부가 일제의 톡아에 침해당하니 선생은 다시금 항일구국의 막바지 전선에 나서 호남의 의민용사들을 통솔 지휘하게 되었다. 1907년 9월에 장성 수록산중에서 의기를 세우고 수백명의 의민과 병기를 모아 전투훈련을 거듭하는 동시에 혈맹고천하고 의격을 국내외에 광포한 다음 군규를 엄정히 하고 일제침략의 倀鬼(창귀)인 일진회와 친일주구배를 응징하여 왜적을 도처에서 유격 도살하게되니 의군의 사기는 호남전역에 크게 떨쳐 수천에 달하였다. 나아가 영광 법성포 무장 고창 문주사 장성 오사촌등지에서 혈전사투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렸고 이같이 인근 수읍을 활거하던중 담양 추월산성에서 암야농무중에 적의 기습을 받아 고전 패배를 면치 못하게되니 선생은 선봉장 김준으로 더불어 소병탈주하여 진용을 재정비하는 동시에 차기작전을 마련커저 하였다. 이에 평창방면으로 진출한 김준 선봉장은 왜적의 지휘관 吉田騰三郞외 다수 별마를 무동촌에서 도살하여 놀라운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방향을 달리 하여 고창 복흥산으로 진입한 선생은 패잔병의 소수병력을 인솔하고 구수촌사에서 신정의 조식을 취코저 하다가 불행히도 수십명 왜적에게 피습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고 말았다. 이 급보를 듣고 창평의 김준 선봉장은 30명의 정예를 휘몰아 압송도상의 선생을 탈환구출코저 광주경양역까지 추격하였으나 未及(미급) 실패하고 선생은 다음날 무신 정월 초이일에 광주시내 서천백사장에서 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출사미첩신선사 탄일증년몽역허)) 군사를 이르켜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일찌기 해를 삼키려던 꿈이 또한 헛되었고나의 일구를 남기고 적의 흉도에 우해순국하셨다. 해는 곧 일본을 가르킴이다. 왜적이 선생을 이처럼 시중 번화지에서 흉해하고 노시(路屍)로 방치한것은 인군의병이 선생을 탈환코저 연합 습격하여 올 의구심과 아울러 그들의 지휘관 吉田이 도살 당한데 대한 복수심이었다. 선생의 비보가 전파되매 전시중은 비분과 살기에 충만하였고 가로상에는 구정의 축하도 잠영되었다. 이에 지사 안규용은 경건히 선생의 노시(路屍)를 시내 서탑동 현 광주공원에 가장하니 흉적으로서도 선생의 묘전에 호남창의대장 기삼연지묘라고 목비를 세울수밖에없었다. 이 얼마나 충렬장절한 순국이더냐 선생은 정녕 저 임란이래 우리민족이 발휘한 항일독립정신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으니 진실로 嗚咽萬古(오인만고)요 樹風百世(수풍백세)라 하리라. 선생의 휘하에서 배출된 김준 字 태원 전수용 호 해산 박경래 字 도경 김영엽 字 여회 이석용 호 정재 진사 이철형 김익중 字 봉거 김봉규 字 공삼 김용구 字 유성 이순모 호 대극 김봉수 전참위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