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향교 유림항일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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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 11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장을 맡아 전열을 정비한 후 나주로 나가 나주 출신 정석진 등과 합세 친일 참서관을 집단 처단하고 관찰사를 추출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고 광주 광산관에 호남대의소를 설치하여 이 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광주경무과 기록물 전남폭도사에는 1906년 유생 최익현이 "謹告八道士民書"라는 격문을 돌리자 폭도 봉기의 징후가 도내에서 맨 처음 있었던 곳은 유생이 많고 완고한 자들이 모여 있는 장성군이었다. 곽한풍 외 7명이 은밀히 총기를 모으로 또 수십명의 이민들을 모아 야간에 회합하여 총기와 죽창으로 조련을 하고 있다는 설이 있어 광주 경무고문지부에서 보조원 쯔나시마부장 이하 11명을 파견 수사한 결과 음력 12월 26일 장성향교에서 집회를 갖고 1명의 위원을 뽑아 최와 남원에서 회견케 하는 한편 총기 죽창 모으기와 야간조련의 사실을 확인했다. 우두머리 격인 곽한풍 전익중 송영신(본명 영순) 등 3명을 군아에 억류하고 총포 17 군도 2 죽창 3백 및 대나무 끝에 칼을 꽂은 것 106점을 압수하여 군수에게 보관시켰는데 이떄 벌써 이면에는 비범한 세력으로 배일적 폭동의 기운이 장성향교를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9년 3월 전국향교 유림대표 곽종석 등 137명이 서명한 독립탄원서(파리장서)를 심산 김창숙을 통하여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내려다 일경에 발각되어 이들은 고문으로 순직하거나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이와 같이 장성유림과 향교가 나라를 위해 남긴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여 기리고자 장성 유림들의 뜻을 모아 여기에 빗돌을 세우니 아~ 장성향교 호국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더불어 일월처럼 빛날것이다.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 110 장성향교 유림항일사적비를 찾았다.
장성향교
장성향교
향교는 유학을 교육하려고 지방에 설립한 국가 교육기관이다. 장성향교는 고려 말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을 교육하고 교화하려고 창건하였다. 조선 태조 3년(1394)에 북일면 오산리에 있던 향교를 복원하였고, 임진왜란때 불타서 없어졌는데 선조 33년(1600)에 장안리에 다시 지었다. 효종 9년(1658)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정조 20년(1796)에 도유사 박상초등이 다시 짓고, 1962년과 1970년에 다시 손질하였다.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교육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대성전 좌우측으로 동재와 서재가 있다.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인 대성전이 있고, 좌우측으로 동무와 서무가 있으며 그 외 부속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외삼문 앞쪽에는 홍살문이 있다.
*도유사(都有司) : 향교, 서원, 종중, 계중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우두머리
儒林杭日史蹟碑(유림항일사적비)
儒林杭日史蹟碑(유림항일사적비)
儒林杭日史蹟(유림항일사적)
우리 장성은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 청백리의 고장의 고장이란 명성을 지녔던 것은 선비정신과 바른 국가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선비들이 장성향교를 통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구한말 우리나라에 서양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 나라의 지도자들이 지혜롭게 대응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하였다. 이때를 틈타 간악한 왜적들이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침략과 수탈을 노골화하였고 이에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봇물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1896년 기소사 선생의 문하인 송사 기우만선생은 기주인 양상태 등 유림들을 모아 의병본부를 장성향교에 정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렸다. 이에 각지에서 호응하는 기세가 충천하여 담양의 고광순과 이학승 등이 합류하였으며 특히 우국충정이 넘친 성재 기삼연 의병대장은 호군장 이기창 등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와서 스스로 선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