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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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387
탐방로그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387에 위치한 삼일사를 찾았다. 삼일사우는 일제침략에 대한 전남의 대표적인 항거로 평가되는 북이면 모현리 삼일운동의 거사를 일으켰던 류상성외 12명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899년에 창건되었다. 방문 당시에는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삼일사묘정비문
장성 북이면 모현리에 입사하고 4323년 경오추에 예성한 삼일사는 기미독립열사이신 예암 고령 신경식,석운 문화 유상능, 무호 문화 유상설, 양강 장흥 고용석, 만암 동래 정병모, 후송 고령 신상우, 만성 고령 신태식, 후암 고령 신국호, 호은 문화 유상학, 석헌 문화 유상순, 밀양 박광우, 해주 오상구, 성당 고령 신종식등 13열사의 의행과 투혼을 추모하기위하여 제사지내는곳이다.
한말 국운이 비색하여 국파군망하니 모현리의 신경식, 유상능등 우국지사들은 시국을 논하면서 지성민에게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던중 기미년 봄에 고종황제의 붕어비보를 듣고 의분강개하여 인산일을 기해 신경식, 유상능이 상경 탐동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독립선언문을 입수 귀향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만국강화회의에서 약소 민족에게 민족자결권을 부여해야한다는 국제여론이 비등하고 있음을 주시시켰다. 4252년 음 3월 3일 모현천변에 정병모, 신태식, 유상학, 신종식, 고용석, 유상설등 7인이 모여 국제정세를 논하며 의거할것을 제의하시 모두 산동하여 즉시 결행키로하고 동민에게 알리니 순식간에 200여명이 운집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신국호의 선도로 만세를 부르며 동구 느티나무앞에 모여 태극기를 계양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
한후 천지가 진동할만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모귀가하였다. 이 사실을 탐지하고 사거리 주재 일경이 유상설, 고용석, 유상학, 신종식을 체포해가니 신경식, 유상능등이 대책을 논의, 익일 사거리시장일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계속하며 4열사 석방을 요구하고 일제만행에 항쟁하기로 하였다. 4일 아침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등이 서거리에서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4열사 석박을 요구하다 일헌병에게 체포되었으며 유상학, 신국호는 금포에 대한독립이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박광우, 오상구등 동민들과 사거리로 향하며 열렬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왜병에게 피검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만세운동은 장성 전역에 확산되었다. 신종식만 가석방되고 모두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불굴기지하고 의연히 자국의 독립만세를 제창한것이 되가 되느냐고 항변하였으나 광주지방법원서 징역 6월부터 2년가지 선고하니 불복하고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여 각각 6월씩의 감형으로 유상설, 고용석은 1년 6월,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호는 1년, 유상학, 유상순, 오상구, 박광우는 6월의 징역에 처하였으니 이는 신경식, 유상능의 옥외 구명이 지대함이다. 그러나 이에 불복하고 경성고법에 상고하여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에 따른 4000년 조선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며 국가는 애민여옥하고 국민은 애국여천이어늘 조선인으로서 조선독립을 주장한것은 무죄라고 항변하였다만 기각당해 극심한 옥고를 치루었고 출옥후에도 삼짇날 화전놀이를 빙자하여 촛대봉에서 만세를 제창하며 그날을 기념하였고, 신경식은 오북의숙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그 덕성에 훈도케 하였다. 열사들은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통한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오직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앞날을 염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조서하셨으니 애석망석로다. 원 모현동민들이 공동작업으로 위답6두락을 구입하여 열사들의 추모제를 모시다가 광복호 국가에서 훈장을 수여하고 년금까지 지급하였으나 후손들이 산재하고 성력이 못미치어 입사조두하지못하던중 군내 유림들이 열사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추모하고자 삼일계를 구성하고 위령제를 봉행하다가 신경식열사의 질인 신태호가 열사들의 의거사적을 모집하고 재판기록을 발굴하여 사적고증이 백일하에 천양되니 창사키위해 4320년 정유4월 1일 군내 유지와 유족후손 15인이 삼일사 건립을 추진하여 신태호회장이 헌납
한 부지 1500평및 성금 이천만원과 유지후손들의 성금 그리고 도와 군의 보조금을 받아 신실, 강당, 외삼문을 준공하니 묘모가 유신하고 산천이 증채하도다. 오호라 열사들의 우국중의정신이 투철하여 기미독립운동을 전개하시다 옥고까지 겪은 숭고한 행적은 민족사에 영원히 빛나고 만세의 귀감이 되리라. 본사를 창건하는데 현로하신 신태호, 유상문, 유두환, 신호섭, 신흥수등이 이제 또 묘정비를 세우고자 하니 사임? 의연 이병식이 비문을 불초에 청하거늘 천견박식으로 어감당력이리오 고사불획....
문이 잠겨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387 삼일사
삼일사우
삼일사우는 일제침략에 대한 전남의 대표적인 항거로 평가되는 북이면 모현리 삼일운동의 거사를 일으켰던 류상성외 12명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899년에 창건되었다.
1919년 3.1운동후 만국강화회의에서 종속국가들이 민족자결 선언에 대한 영향으로 4월 3일(음력 3월 3일, 삼진날) 아침에 마을옆 촛대봉에 화전놀이를 빙자한 마을주민 200여명이 집결하여 감격적인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나, 당시 면장의 밀고로 주동자 3명이 체포되어 다음남 4월 4일 사거리 장날을 기하여 전 주민과 장꾼들이 합세 독립기를 앞세우고 파출소로 향하여 구금된 지사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왜병의 무차별한 총성으로 해산되고 주동자 8명이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충옥후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류상설, 고용석, 정병모, 신태식, 신상우, 신국호, 류상학, 류상순, 오상구, 박광우, 류상능, 신경식, 신종식열사의 구국의 혼과 독립정신을 계승하고자 도,군, 주민, 유족들이 합심하여 이곳에 삼일사우를 건립하였다.
성암 신공 태호 공적비
성암 신공 공적비문
3.1운동 장성의거의 발상지인 이곳 모현리에 민족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선열들의 고귀한 애국혼을 추앙하기위하여 건립된 삼일사는 성암 신공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공은 1922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서 고령신씨 ....태어나시니 장성의거 13열사의 대표이며 오북의숙을 설립하여 항일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예암 신경식열사는 공의 백부이시고 후암 신국호열사는 백형이시다.
공은 항일독립지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시절부터 일제의 핍박과 망국민의 고통을 겪으면서 성장하였으며 해방후 혼란과 전쟁후의 궁핍한 상황속에서 경제발전만이 국가번영의 첩경이라는 입지로 일관하여 기업경영에 전념하는 한편 1961년부터 1991년까지 30여년간 광주상공회의소에 관려 15년간 회장직에 재임하면서 광주권 생산도시화 운동을 제창하여 성공시킨 공인이며 성암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수많은 영재들을 육성하고 만대학원이사장을 맡아 광덕중고등학교를 건립하는등 육영과 문화사업에도 진력한 독지가이시다. 공께서는 광복후 애국선열들의 현창사업이 이곳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데도 일제때부터 13열사의 위령제를 매년 봉행해오는 장성의거의 높은 뜻이 발현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시어 당시의 재판기록을 찾아 사적고증을 명확히하고 사우건립을 발의하여 부지 1500여평과 기금 이천만원을 헌납하였으며 당국
에 건의하여 8500만원의 정부보조금을 지원받아 삼일사건립을 완성케 하였다. 이에 열사들의 후손들은 물론 군민들의 숙원을 성취시킨 공의 큰 공과 열사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후손에 함양코자하는 공의 높은 뜻을기리고자 이 비에 그 공적을 새긴다.
삼일사 묘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