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359-1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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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수 선생은 전라남도 완도 출신 애국지사로, 1926년 11월 광주농업학교 재학중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 노예교육체제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 조직 및 결사에 참여하였다. 농업학교 졸업 후에는 완도의 사립 약산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직,간접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나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피체된 후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그는 완도에서 황동윤·최창규와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야학교사, 독서회원 등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는 등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위 추모비는 이러한 백산 문승수 선생의 항일 독립투쟁 정신을 후세에 전하여 길이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겨레의 불기둥
척박한 식민지 하늘 아래 나라 잃은 큰 설움 가슴에 안고 감옥을 교실 삼아 깨우친 진리
자나깨나 일편단심 애오라지 나라 사랑 징벌방 담벽에 피눈물을 새겼다.
망국의 노예교육 철폐하라 성진회 얼싸안고 동지들 모아 무등을 갈랐던 독립의 함성
잠을 깨라 앞장 서라 온 몸 불사르어 자유를 외쳤다.
아 백산 문승수 겨레의 불기둥 불멸의 그 이름 핏방울 방울마다 무궁화 피어나고
교실마다 감옥마다 천고절을 새겨온 눈물이여 푸룬 솔 곧은 대 자랑찬 민족의 불사조여.
2008. 5. 후인 문병란 근송
척박한 식민지 하늘 아래 나라 잃은 큰 설움 가슴에 안고 감옥을 교실 삼아 깨우친 진리
자나깨나 일편단심 애오라지 나라 사랑 징벌방 담벽에 피눈물을 새겼다.
망국의 노예교육 철폐하라 성진회 얼싸안고 동지들 모아 무등을 갈랐던 독립의 함성
잠을 깨라 앞장 서라 온 몸 불사르어 자유를 외쳤다.
아 백산 문승수 겨레의 불기둥 불멸의 그 이름 핏방울 방울마다 무궁화 피어나고
교실마다 감옥마다 천고절을 새겨온 눈물이여 푸룬 솔 곧은 대 자랑찬 민족의 불사조여.
2008. 5. 후인 문병란 근송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359-1 애국지사 백산 문승수 선생 추모비를 찾아왔다.
애국지사 백산 문승수 선생 추모비
건립취지(1905-1950)
백산 문승수 선생의 거룩한 항일 독립투쟁과 애국의 유지를 후세에 전하여 길이 민족의 사표로 삼고자 건립한 추모비입니다.
공적
나라 잃은 이 땅에 젊은리로써 그 서러움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1926.11.3 광주 학생운동의 뿌리였던 성진회를 조직하여 1929.11.3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 민족혼을 일깨우셨으며 1932년 포악무도한 동양척식회사의 전국 수탈에 저항, 전남 협의회를 조직, 주도하여 수년간 참옥한 옥살이를 하시다가 4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1988년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1묘역에 부인과 안장되셨습니다. 이곳을 찾으신 분들께서는 일제 강점기때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몸 바치신 순국 선열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보존과 청결에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건립취지(1905-1950)
백산 문승수 선생의 거룩한 항일 독립투쟁과 애국의 유지를 후세에 전하여 길이 민족의 사표로 삼고자 건립한 추모비입니다.
공적
나라 잃은 이 땅에 젊은리로써 그 서러움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1926.11.3 광주 학생운동의 뿌리였던 성진회를 조직하여 1929.11.3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 민족혼을 일깨우셨으며 1932년 포악무도한 동양척식회사의 전국 수탈에 저항, 전남 협의회를 조직, 주도하여 수년간 참옥한 옥살이를 하시다가 46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1988년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1묘역에 부인과 안장되셨습니다. 이곳을 찾으신 분들께서는 일제 강점기때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몸 바치신 순국 선열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보존과 청결에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애국지사 백산 문승수 선생 추모동산
애국지사
백산 문승수 선생 추모비
백산 문승수 선생 추모비
애국지사 백산 문승수 선생 일대기
애국지사 백산 문승수 선생은 국운이 기울던 1905년 1월 21일 전남 완도군 군외면 대아리에서 강성군 문익점 중시조의 19대손으로 뮨양준과 경주이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세살때 부모님을 여의고 통정대부이자 사관울 지낸 바 있는 백수 문학서 조부의 지극한 사랑속에 타고난 기상 총명하였으며 어릴적부터 신동이라 불리었다. 1923년 완도 공립보통학교를 5년 수료하고 광주농업학교에 입학 우수한 성적과 함께 매사에 적극적이고 수철하며 용맹한 성격을 지녀 나라잃은 이땅의 젊은이로서 그 서러움과 울분을 참지못하여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보의 왕재일 장재성 최규창과 광주농고의 박인생 정남균 문승수등 주동자 익에 두 학교학생 임주홍 김광용 정종석 정동수 정우채 김한필 안종익 김창주 채영석 국군엽등 16명이 모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뿌리였던 성진회를 조직 주도하여 민족혼을 일깨웠으며 조국 독립쟁취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며 투쟁하였다. 그 후 비밀누설의 우려와 전략상 1927년 3월 일시해체하고 학교별로 비밀결사 조직을 강화하고 그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1928년 2월 11일 고보의 임주홍 농고의 문승주 사범의 이동선등 3개교 학생 13명이 모여 졸업후에도 상호 긴밀히 연락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로 굳게 결의하였다. 1928년 3월 수석졸업을 하고 완도 약산사랍보통학교에 재직하면서 야학과 독서회까지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중 1928년 11월 3일 광부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 조종과 주동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의 중형을 언도받아 골육이 무너지는 참혹한 고문을 겪으며 복역중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하여 미결 1년 8개월만인 1931년 6월 13일 징역1년이 언도되어 북역하였다. 선생은 혹독한 옥고를 치른후 다시 1932년 동양척식회사의 수탈에 저항 전남운동협의회를 조직 그 산하에 농임조합건설위원회를 만들고 그 재정 책임을 맡아 활동하면서 야학가 독서회, 농민계몽, 소작쟁의등 사회운동을 통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4년 2월에 전남?의회의 탄로로 동지들과 피체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격고 미결 3년만인 1936년 12월 28일 목포지법에서 1년6월형을 확정받고 복영하였다. 피끓는 청춘과 꿈도 모두 접고 오로지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치시고도 1950년 56세를 일기로 한많은 짧은 생애를 마칙셨으니 그 어찌 비통하지 않으리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포장 애국장을 추서하고1988년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1묘역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어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피맺히게 염원하고 계시니 육체는 사라렸어도 고귀한 애국혼은 이 나라 이 겨레의 독립, 자유와 정의를 위해 살 한점 피 한방울 남김없이 불사르고 평생을 싸우시다가 가셨으니 후대에 귀감이 되고 만고에 피어날 민족의 빛이기에 천고절의 애국심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고향 산자락에 추모비를 세웁니다.
애국지사 백산 문승수 선생은 국운이 기울던 1905년 1월 21일 전남 완도군 군외면 대아리에서 강성군 문익점 중시조의 19대손으로 뮨양준과 경주이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세살때 부모님을 여의고 통정대부이자 사관울 지낸 바 있는 백수 문학서 조부의 지극한 사랑속에 타고난 기상 총명하였으며 어릴적부터 신동이라 불리었다. 1923년 완도 공립보통학교를 5년 수료하고 광주농업학교에 입학 우수한 성적과 함께 매사에 적극적이고 수철하며 용맹한 성격을 지녀 나라잃은 이땅의 젊은이로서 그 서러움과 울분을 참지못하여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보의 왕재일 장재성 최규창과 광주농고의 박인생 정남균 문승수등 주동자 익에 두 학교학생 임주홍 김광용 정종석 정동수 정우채 김한필 안종익 김창주 채영석 국군엽등 16명이 모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뿌리였던 성진회를 조직 주도하여 민족혼을 일깨웠으며 조국 독립쟁취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며 투쟁하였다. 그 후 비밀누설의 우려와 전략상 1927년 3월 일시해체하고 학교별로 비밀결사 조직을 강화하고 그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1928년 2월 11일 고보의 임주홍 농고의 문승주 사범의 이동선등 3개교 학생 13명이 모여 졸업후에도 상호 긴밀히 연락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로 굳게 결의하였다. 1928년 3월 수석졸업을 하고 완도 약산사랍보통학교에 재직하면서 야학과 독서회까지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중 1928년 11월 3일 광부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 조종과 주동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의 중형을 언도받아 골육이 무너지는 참혹한 고문을 겪으며 복역중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하여 미결 1년 8개월만인 1931년 6월 13일 징역1년이 언도되어 북역하였다. 선생은 혹독한 옥고를 치른후 다시 1932년 동양척식회사의 수탈에 저항 전남운동협의회를 조직 그 산하에 농임조합건설위원회를 만들고 그 재정 책임을 맡아 활동하면서 야학가 독서회, 농민계몽, 소작쟁의등 사회운동을 통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4년 2월에 전남?의회의 탄로로 동지들과 피체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격고 미결 3년만인 1936년 12월 28일 목포지법에서 1년6월형을 확정받고 복영하였다. 피끓는 청춘과 꿈도 모두 접고 오로지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치시고도 1950년 56세를 일기로 한많은 짧은 생애를 마칙셨으니 그 어찌 비통하지 않으리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포장 애국장을 추서하고1988년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1묘역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어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피맺히게 염원하고 계시니 육체는 사라렸어도 고귀한 애국혼은 이 나라 이 겨레의 독립, 자유와 정의를 위해 살 한점 피 한방울 남김없이 불사르고 평생을 싸우시다가 가셨으니 후대에 귀감이 되고 만고에 피어날 민족의 빛이기에 천고절의 애국심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고향 산자락에 추모비를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