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당사리 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등대 가는 길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처음에는 포장이 되어 있었다.
포장길에 이어서 가파른 오르막으로 산 정상까지 올라가야 했다.
정상에서 또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야 했다.
가다보니 등대항에서 올라오는 포장길과 만나게 되었다.
항일전적비
항일전적비
일본은 1876년 우리나라와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대한 주요항구의 개항, 해안측량권, 해도작성권, 개항장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치외법권 등을 요구하면서 강제통상를 추진하였다. 일본은 이런 무리한 요구를 강행하기 위해 우리나라 동어해와 남해에에 일본선박을 항해토록 하였다. 이에따라 일본선박의 안전항해를 돕기위한 수단으로 우리나라 남단의 자지도에도 1909년 1월 등대를 설치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 지방 사람들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터에 소안출신 동학군 이준화선생과 해남 이진 성명미상의 의병 5,6명이 1889년 2월 24일 자지도 등대를 습격, 일본 등대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헌병 1개소대 30여명을 소안에 파견하여 소요에 대비한 후 명선리에서 일박하고 철수하였다.
그런데 자지도 등대 구냐에는 의거 당시 피살된 일본인 조난자를 위해 세웠던 조난기념비가 파손된채 보존되어 있다. 파손된 비에는 "등대간수가 1909년 2월 24일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는 요지의 글이 남아있다. 이것은 역으로 이 의거에 참가했던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이 지방 항일운동의 치열성을 증언해 주고 있다.
후손된 저희들은 이 의거에 참가한 선열들의 항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 항일전적비를 세운다.
1997년 11월 17일 완도군수 차관훈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이근우
소안면장 김명석
일본은 1876년 우리나라와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대한 주요항구의 개항, 해안측량권, 해도작성권, 개항장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치외법권 등을 요구하면서 강제통상를 추진하였다. 일본은 이런 무리한 요구를 강행하기 위해 우리나라 동어해와 남해에에 일본선박을 항해토록 하였다. 이에따라 일본선박의 안전항해를 돕기위한 수단으로 우리나라 남단의 자지도에도 1909년 1월 등대를 설치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 지방 사람들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터에 소안출신 동학군 이준화선생과 해남 이진 성명미상의 의병 5,6명이 1889년 2월 24일 자지도 등대를 습격, 일본 등대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헌병 1개소대 30여명을 소안에 파견하여 소요에 대비한 후 명선리에서 일박하고 철수하였다.
그런데 자지도 등대 구냐에는 의거 당시 피살된 일본인 조난자를 위해 세웠던 조난기념비가 파손된채 보존되어 있다. 파손된 비에는 "등대간수가 1909년 2월 24일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는 요지의 글이 남아있다. 이것은 역으로 이 의거에 참가했던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이 지방 항일운동의 치열성을 증언해 주고 있다.
후손된 저희들은 이 의거에 참가한 선열들의 항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 항일전적비를 세운다.
1997년 11월 17일 완도군수 차관훈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이근우
소안면장 김명석
아침 역광이어서 정면에서 촬영하기가 쉽지 않다.
항일전적비
일본은 1876년 우리나라와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대한 주요항구의 개항, 해안측량권, 해도작성권, 개항장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치외법권 등을 요구하면서 강제통상를 추진하였다. 일본은 이런 무리한 요구를 강행하기 위해 우리나라 동어해와 남해에에 일본선박을 항해토록 하였다. 이에따라 일본선박의 안전항해를 돕기위한 수단으로 우리나라 남단의 자지도에도 1909년 1월 등대를 설치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 지방 사람들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터에 소안출신 동학군 이준화선생과 해남 이진 성명미상의 의병 5,6명이 1889년 2월 24일 자지도 등대를 습격, 일본 등대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일본은 1876년 우리나라와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을 빌미로, 우리나라에 대한 주요항구의 개항, 해안측량권, 해도작성권, 개항장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치외법권 등을 요구하면서 강제통상를 추진하였다. 일본은 이런 무리한 요구를 강행하기 위해 우리나라 동어해와 남해에에 일본선박을 항해토록 하였다. 이에따라 일본선박의 안전항해를 돕기위한 수단으로 우리나라 남단의 자지도에도 1909년 1월 등대를 설치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 지방 사람들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터에 소안출신 동학군 이준화선생과 해남 이진 성명미상의 의병 5,6명이 1889년 2월 24일 자지도 등대를 습격, 일본 등대간수 4명을 사살하고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헌병 1개소대 30여명을 소안에 파견하여 소요에 대비한 후 명선리에서 일박하고 철수하였다.
그런데 자지도 등대 구냐에는 의거 당시 피살된 일본인 조난자를 위해 세웠던 조난기념비가 파손된채 보존되어 있다. 파손된 비에는 '등대간수가 1909년 2월 24일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는 요지의 글이 남아있다. 이것은 역으로 이 의거에 참가했던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이 지방 항일운동의 치열성을 증언해 주고 있다.
후손된 저희들은 이 의거에 참가한 선열들의 항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 항일전적비를 세운다.
1997년 11월 17일 완도군수 차관훈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이근우
소안면장 김명석
그런데 자지도 등대 구냐에는 의거 당시 피살된 일본인 조난자를 위해 세웠던 조난기념비가 파손된채 보존되어 있다. 파손된 비에는 '등대간수가 1909년 2월 24일 흉탄에 쓰러졌기에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1910년 이 비를 세운다.'는 요지의 글이 남아있다. 이것은 역으로 이 의거에 참가했던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이 지방 항일운동의 치열성을 증언해 주고 있다.
후손된 저희들은 이 의거에 참가한 선열들의 항일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 항일전적비를 세운다.
1997년 11월 17일 완도군수 차관훈
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장 이근우
소안면장 김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