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연 의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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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월평리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항일애국지사 유시연 선생의 명은 관옥이요 자는 치선이시며 본관이 문화이시다. 고종 갑자(서기 1864년 정월 2일 신북면 모산마을에서 탄생하시어 어릴적부터 기상이 준걸하고 기지가 뛰어난 비범한 인물로서 평소에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남다르게 투철하였다 때는 이조말엽 왜세가 침입하여 국권을 찬탈하고 을사보호조약을 맺는등 국운이 파국에 이르메 전국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야 구국투쟁이 전개될때 유의사꼐서는 분연히 의병대열에 참가하여 당시의 의병장 심남일의 막하에서 뛰어난 무술과 지략을 인정받아 총장이 되시어 장성 영광 함평 영암 릉주등지에 잠재한 왜군을 섬멸하고자 대오를 정비하여 의병들을 각자 연고지에
배치하고 유통장은 나주 영암지구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이 지구는 지형지리적 여건으로 적의 수가 많고 그 세가 강해서 수차의 격전이 있었는데도 그 중 영암 소초마을의 혈전을 소개하면 유통장이 이곳에 포진하고있다는 오보를 받은 적의 기마부대 지휘자인 금평산(고도히라야마)은 부하 50여명과 함께 소초마을을 기습 진격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식량을 약탈 부녀자를 납치하는 등 언행을 저지른다는 정보를 받고 후군장인 ??우 나성화 최우평 전성재에게 원병을 요청하여 200여병력으로 적을 포위하고 혈전끝에 금편산과 그의 부하 20여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 동료 조기보가 순절하고 전략상 ???내 산으로 이동하여 적이 주둔한 농과로 진격하는 도중 적의 기습으로 2명의 사상자가 생겨 진격을 바꾸어 능주방면으로 후퇴하였고 그곳에 주둔한 동료 최우평 ?도숙과 합세하여 병력을 보강하고 적진이 있는 농?로 진격하여 격렬한 격전 2ㅣ일만에 적 사살 50명의 전과를 올리고 적을 모두 격퇴시켰으나 아군 피해도 20명이나 되었다. 이때 소촌마을에 ??부대 전병이 출현하였다는 권택의 첩보를 받고 심야를 이용해 소초마을에 당도하야 적의 동태를 살피고 ??한 작전 지휘를 하면서 능숙한 활 솜씨로 적 6명을 사살하고 선봉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방년45세를 일기로 순절하시다. 이해가 1909년 을유 8월 7일이며 유해는 그곳에 촌민들이 매장하였다가 2년이 지난뒤 이천리 대리동 선산에 이장하였다. 초배에 나주최씨는 무육으로 조사하고 계배 ??씨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인항은 무남독녀료 둘째 인권(일면 삼수)은 4남 1녀요 딸은 원주?에
게 출가하였다. 오호라 거룩한 구국의 충혼은 천추에 빛나고 육신은 구원에 고이 잠든지 80여년만에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었다 그의 혈손 점열 신북면장 웅경 열경원등은 조부의 의적비를 후세에 남가고저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를 가상히 여겨 그의 행장을 고찰해서 서술하였으니 이 고귀한 절의를 음앙하기 바람니다.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 있다고 한 의병장 유시연 의적비가 신북중학교 옆 도로변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