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칠곡리 산81-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주희 세희 주선 은주 혜련 혜진 혜민 성숙 영희이다. 하늘이 낸 공의 손자 영후 군이 근대사에 조예가 깊게 된 것은 애국정신과 의병활동을 후세에 바로 밝히려는 결과였다. 최근 본 고을 홍농읍 칠곡리 연화동 동산자락에 합조로 모시고 모든 기록을 묘비문에 담고자 필암서원까지 불망를 찾아와 청문을 하기에 공의 애국정신과 영후군의 숭조사상에 느낀 바 깊어 삼가 옷깃을 여미고 우와 같이 서술하노라.
성균관전학 및 필암서원 집강 태인 박래호가 짓고, 전주 이호회 쓰다.
성균관전학 및 필암서원 집강 태인 박래호가 짓고, 전주 이호회 쓰다.
영광군 홍농읍 칠곡리 산 81-6 서종채 의병대장의 묘를 찾았다. 서종채 의병장은 고창 출신이지만 묘소는 인접한 영광군에 있었다.
愛國志士 義兵將 徐鍾採의 墓(애국지사 의병장 서종채의 묘)
義兵大將 利川徐公 鍾採 之墓(의병대장 이천서공 종채 지묘)
의병대장 이천서공 묘표
문선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져야 송백의 푸르름을 안다고 하셨다. 대한절의 추위보다 더 혹독햇던 일제 만행을 겪으면서 송백보다 더 푸르름을 보여주신 애국지사가 있었으니 곧 서종채 의병장이다. 의병장의 본관은 이천으로서 시조인 신일은 신라 흥덕왕과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11왕조를 섬기면서 벼슬은 아간에 이르렀다. 중조인 린은 고려 고종 때 병부상서대광내의령에 이르렀는데 권간들의 모함으로 영평감무에 좌천되었다. 조선왕조 단종 때 사롱 가운데 한 분인 효환의호는 점롱으로 벼슬은 주부예빈시정과 증자헌대부이조판서이니 의병장의 17대조이다. 광부는 고조, 한환은 증조, 녹수는 조부이며, 아버지는 상필, 어머니는 천안전씨와 경주김씨 두 분
문선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져야 송백의 푸르름을 안다고 하셨다. 대한절의 추위보다 더 혹독햇던 일제 만행을 겪으면서 송백보다 더 푸르름을 보여주신 애국지사가 있었으니 곧 서종채 의병장이다. 의병장의 본관은 이천으로서 시조인 신일은 신라 흥덕왕과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11왕조를 섬기면서 벼슬은 아간에 이르렀다. 중조인 린은 고려 고종 때 병부상서대광내의령에 이르렀는데 권간들의 모함으로 영평감무에 좌천되었다. 조선왕조 단종 때 사롱 가운데 한 분인 효환의호는 점롱으로 벼슬은 주부예빈시정과 증자헌대부이조판서이니 의병장의 17대조이다. 광부는 고조, 한환은 증조, 녹수는 조부이며, 아버지는 상필, 어머니는 천안전씨와 경주김씨 두 분
의병대장 이천서공 묘표
문선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져야 송백의 푸르름을 안다고 하셨다. 대한절의 추위보다 더 혹독햇던 일제 만행을 겪으면서 송백보다 더 푸르름을 보여주신 애국지사가 있었으니 곧 서종채 의병장이다. 의병장의 본관은 이천으로서 시조인 신일은 신라 흥덕왕과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11왕조를 섬기면서 벼슬은 아간에 이르렀다. 중조인 린은 고려 고종 때 병부상서대광내의령에 이르렀는데 권간들의 모함으로 영평감무에 좌천되었다. 조선왕조 단종 때 사롱 가운데 한 분인 효환의호는 점롱으로 벼슬은 주부예빈시정과 증자헌대부이조판서이니 의병장의 17대조이다. 광부는 고조, 한환은 증조, 녹수는 조부이며, 아버지는 상필, 어머니는 천안전씨와 경주김씨 두 분
문선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져야 송백의 푸르름을 안다고 하셨다. 대한절의 추위보다 더 혹독햇던 일제 만행을 겪으면서 송백보다 더 푸르름을 보여주신 애국지사가 있었으니 곧 서종채 의병장이다. 의병장의 본관은 이천으로서 시조인 신일은 신라 흥덕왕과 효공왕에 이르기까지 11왕조를 섬기면서 벼슬은 아간에 이르렀다. 중조인 린은 고려 고종 때 병부상서대광내의령에 이르렀는데 권간들의 모함으로 영평감무에 좌천되었다. 조선왕조 단종 때 사롱 가운데 한 분인 효환의호는 점롱으로 벼슬은 주부예빈시정과 증자헌대부이조판서이니 의병장의 17대조이다. 광부는 고조, 한환은 증조, 녹수는 조부이며, 아버지는 상필, 어머니는 천안전씨와 경주김씨 두 분
이니 전유인은 출산하지 않았다. 고종 17년 1880 경진 10월 15일 무장면 백양마을에서 태어난 의병장은 아명은 채열이고 자는 응호이니 지혜와 용력이 뛰었는가 하면 강개한 큰 뜻이 있었다. 효제돈목의 학문과 한의술 또는 무기를 제조하는 재능까지 겸비한 공은 섬나라 왜적이 침범한 한말을 당하여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정미 1907년에 기삼연과 참군하여 많은 전략을 세웠다. 무신 1908년에 기공이 장렬하게 순절한 뒤에 다시 이대국의 의막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엇는데 얼마 안 되어 이대장이 또 전사하자 군중의 추대로 대장이 된 공은 드디어 완전무장을 갖춘 의병 수백을 인솔하고 담양 추월산, 나주, 함평 성문내, 영광과 고창 고성산, 무장, 부안 등지를 근거로 활동하면서 왜군 수비대와 접전하면서 수백급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우는 가하면 고문경 유장렬 김홍일 이태섭 최경환 등과 군자금을 조달하면서 6~7년 간 활동을 하다가 마침내 왜적에게 붙잡혔다. 공은 광주법원 전주지청에서 15년형을 받았고 대구법원에서 무기를 받아 계속된 고문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꽃다운 37세로 병진 양 4월 22일 순절하였다. 위와 같은 사실은 한말 영광의병사 사료집 한국독립사와 대한민국 독립운동 공훈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홍농면 유림들이 올린 천장 이외 많은 추천서가 있어 1980년에는 최규하 대통령의 건국훈장 국민장이 내렸는가 하면 1993년에는 김영상 대통령의 국가유공자증이 수여되었다. 배유인은 전주 이강연의 따님으로 경진생이며 여사다운 기질이 있어 왜경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심한 고문 끝에 마침내 정사 10월 14일에 삶을 마치었다. 2남 1녀를 두셨으니 아들은 재윤 재연이고 사위는 창원 황규현이다. 전차대대장인 인후와 정후 동환과 서 김원용 김영규 조광환 홍동의 처는 큰아들이 낳았고 희후와 덕후와 박진용 처는 둘째가 낳았다. 증손은 대원 대승 대관 대식 대일 성일 성현 성민 정민 민용 등이며 증손녀는 지현
이니 전유인은 출산하지 않았다. 고종 17년 1880 경진 10월 15일 무장면 백양마을에서 태어난 의병장은 아명은 채열이고 자는 응호이니 지혜와 용력이 뛰었는가 하면 강개한 큰 뜻이 있었다. 효제돈목의 학문과 한의술 또는 무기를 제조하는 재능까지 겸비한 공은 섬나라 왜적이 침범한 한말을 당하여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정미 1907년에 기삼연과 참군하여 많은 전략을 세웠다. 무신 1908년에 기공이 장렬하게 순절한 뒤에 다시 이대국의 의막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엇는데 얼마 안 되어 이대장이 또 전사하자 군중의 추대로 대장이 된 공은 드디어 완전무장을 갖춘 의병 수백을 인솔하고 담양 추월산, 나주, 함평 성문내, 영광과 고창 고성산, 무장, 부안 등지를 근거로 활동하면서 왜군 수비대와 접전하면서 수백급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우는 가하면 고문경 유장렬 김홍일 이태섭 최경환 등과 군자금을 조달하면서 6~7년 간 활동을 하다가 마침내 왜적에게 붙잡혔다. 공은 광주법원 전주지청에서 15년형을 받았고 대구법원에서 무기를 받아 계속된 고문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꽃다운 37세로 병진 양 4월 22일 순절하였다. 위와 같은 사실은 한말 영광의병사 사료집 한국독립사와 대한민국 독립운동 공훈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홍농면 유림들이 올린 천장 이외 많은 추천서가 있어 1980년에는 최규하 대통령의 건국훈장 국민장이 내렸는가 하면 1993년에는 김영상 대통령의 국가유공자증이 수여되었다. 배유인은 전주 이강연의 따님으로 경진생이며 여사다운 기질이 있어 왜경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심한 고문 끝에 마침내 정사 10월 14일에 삶을 마치었다. 2남 1녀를 두셨으니 아들은 재윤 재연이고 사위는 창원 황규현이다. 전차대대장인 인후와 정후 동환과 서 김원용 김영규 조광환 홍동의 처는 큰아들이 낳았고 희후와 덕후와 박진용 처는 둘째가 낳았다. 증손은 대원 대승 대관 대식 대일 성일 성현 성민 정민 민용 등이며 증손녀는 지현
주희 세희 주선 은주 혜련 혜진 혜민 성숙 영희이다. 하늘이 낸 공의 손자 영후 군이 근대사에 조예가 깊게 된 것은 애국정신과 의병활동을 후세에 바로 밝히려는 결과였다. 최근 본 고을 홍농읍 칠곡리 연화동 동산자락에 합조로 모시고 모든 기록을 묘비문에 담고자 필암서원까지 불망를 찾아와 청문을 하기에 공의 애국정신과 영후군의 숭조사상에 느낀 바 깊어 삼가 옷깃을 여미고 우와 같이 서술하노라.
성균관전학 및 필암서원 집강 태인 박래호가 짓고, 전주 이호회 쓰다.
성균관전학 및 필암서원 집강 태인 박래호가 짓고, 전주 이호회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