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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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산47
탐방로그
김철 선생 기념비는 1984년에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아니리요. 이에 先生(선생)의 五十週忌(50주기)를 맞이하여 그 崇高(숭고)한 憂國忠節(우국충절)을 기리고자 後生(후생)들이 뜻을 모으고 援護處長(원호처장) 全羅南道知事(전라남도지사) 靈光郡守(영광군수)의 支援(지원)으로 由緖(유서)깊은 母岳山(모악산) 기슭에 이 碑(비)를 세우다.

國史編纂委員長(국사편찬위원장) 文學博士(문학박사) 全州(전주) 李鉉淙(이현종) 謹撰(근찬)
愛國志士(애국지사) 道康(도강) 金殷燮(김은섭) 前面書(전면서)
咸平(함평) 牟贊源(모찬원) 後面書(후면서)
西紀一九八四年[서기1984년,大韓民國六六年(대한민국66년)] 甲子(갑자) 六月(유월)日(일)
一江金澈先生紀念事業會(일강김철선생기념사업회) 謹竪(근수)
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委員 金澈 先生 紀念碑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 선생 기념비)
一江(일강) 金澈(김철) 선생 紀念碑文(기념비문)

여기는 一江(일강) 金澈(김철) 先生(선생)께서 佛甲寺(불갑사)와 三水洞齋室(삼수동재실)을 據点(거점)으로 하여 救國運動(구국운동)에 活躍(활약)하던 곳이며 宗中世葬碑(종중세장비)에 抗日(항일)의 뜻으로 有朝鮮國(유조선국)이라 冠書(관서)하여 日帝(일제)의 彈壓(탄압)을 받았던 곳이다. 先生(선생)은 淸白吏(청백리) 靈光郡守(영광군수) 金公(김공) 盈宇(영우)의 十六世孫(십육세손)으로서 一八八六年(1886년) 丙戌(병술) 靈光(영광) 九峰面(구봉면) 咸平(함평)에서 태어났고, 明治大學(명치대학) 法科(법과)를 卒業(졸업) 後(후) 鄕里(향리)에 돌아와 農地(농지) 一部(일부)를 小作人(소작인)들에게 分讓(분양)하고 奴屬(노속)을 解放(해방)시키는 등 開化(개화)의 先頭(선두)에 섰으며 庚戌國恥(경술국치)에 臨(임)하여는 悲憤(비분)을 참지 못하고 一九一七年(1917년) 上海(상해)로 亡命(망명)하여 一九一九年(1919년) 一月(1월)에 呂運亨(여운형) 等(등)과 함께 新韓靑年黨(신한청년당)을 組織(조직)하고 金奎植(김규식)은 巴里平和會議(파리평화회의)에 呂運亨(여운형)은 露國(로국)으로 張德秀(장덕수)는 日本(일본)으로 先生(선생)은 徐丙浩(서병호) 鮮于爀(선우혁)과 함께 國內(국내)에 潛入(잠입)하여 孫秉熙(손병희) 先生(선생) 等(등)과 三一擧事計劃(삼일거사계획)을 謀議(모의) 後(후) 下鄕(하향)하여 僧侶(승려)로 變裝(변장) 佛甲寺(불갑사)에 隱身(은신)하면서 先代(선대)의 遺産(유산)인 農土(농토)를 放賣(방매), 巨金(거금)을 마련함과 同時(동시)에 京鄕各處(경향각처)에서 軍資金(군자금)을
募金(모금)하여 萬歲運動(만세운동) 後(후) 다시 上海(상해)로 密航(밀항), 臨時政府(임시정부)樹立(수립)에 積極(적극) 參劃(참획)하여 議政院(의정원) 全羅道(전라도) 代議員(대의원), 交通部(교통부) 次長(차장), 財務(재무) 法務委員(법무위원), 會計檢査院長(회계검사원장), 軍務部(군무부) 財務部(재무부) 判任所長(판임소장) 等(등)을 歷任(역임)하였고, 特(특)히 李奉昌(이봉창) 尹奉吉(윤봉길) 兩大義擧(양대의거)에는 當時(당시) 軍務部長(군무부장)으로서 白凡(백범) 金九(김구) 先生(선생)과 함께 主導(주도)한 事件(사건)으로 倭敵(왜적)의 追擊(추격)이 急迫(급박)해져서 그의 親知(친지)인 피치 牧師(목사)의 집 二層(이층)에 白凡(백범)과 같이 避身(피신)했다가 杭州(항주)로 옮겨 淸泰(청태) 第二旅(제2려) ○三二號(32호) 呂先生(려선생)의 宿所(숙소)에 臨時政府(임시정부) 辦公處(판공처)를 設置(설치)하고 一九三三年(1933년) 五月(5월) 十六日(16일) 첫 國務會議(국무회의)에서 白凡(백범)과 자리를 바꿔 財務(재무)를 맡아 粉骨碎身(분골쇄신) 繼續(계속) 鬪爭(투쟁)타가 過勞(과로)에 지쳐 一九三四年(1934년) 六月(유월) 十九日(19일) 四十八歲(48세)를 一期(일기)로 長逝(장서)하니 臨時政府葬(임시정부장)으로 岳王廟(악왕묘) 後麓(후록)에 묻히셨다. 于今(우금) 五十年(50년)이 넘도록 遺骸(유해)를 옮겨 오지 못한 채 一九六二年(1962년) 三一節(삼일절)에 政府(정부)에서 建國功勞勳章(건국공로훈장)을 追敍(추서)하였다. 또 長姪(장질) 晳(석)은 靈光普通學校(영광보통학교)를 卒業(졸업) 後(후) 從弟(종제) 德根(덕근)과 함께 上海(상해)로 亡命(망명)하여 學業(학업)과 倂行(병행) 獨立運動(독립운동)에 投身(투신), 十九歲(19세) 때 咸平(함평) 尹海光(윤해광)과 함께 羅州(나주) 文平(문평)에 潛入(잠입)했다가 日警(일경)에 被逮(피체), 開城(개성) 少年監(소년감)에서 二年(2년) 獄苦(옥고)를 치른 後(후) 다시 密航(밀항)하여 臨政(임정)外交部(외교부) 秘書長(비서장), 韓人靑年黨(한인청년당) 理事長(이사장), 丙寅義勇隊長(병인의용대장) 等(등)으로 獻身(헌신) 努力(노력)하였고, 特(특)히 尹奉吉(윤봉길) 義擧(의거)때는 爆彈(폭탄)을 提供(제공)한 嫌疑(혐의)로 佛租界(불조계) 內(내)에서 逮捕(체포)되어 中佛日(중불일) 三角(삼각)紛爭(분쟁)을 惹起(야기)케 하였고, 本國(본국)으로 送還(송환)되어 一九三四年(1934년) 十二月(12월) 二十七日(27일) 大邱(대구) 法廷(법정)에서 裁判(재판) 中(중) 脫走(탈주)하였다가 다시 붙잡혀 五年(오년) 懲役(징역)에 八月(8월)이 加刑(가형)되었고, 滿期出獄(만기출옥) 後(후)에는 또다시 豫備檢束(예비검속)으로 淸州刑務所(청주형무소)에 拘禁(구금)되어 爾後(이후) 十數年(십수년)의 獄苦(옥고)를 치른 後(후) 解放(해방)이 되자, 道建國準備委員(도건국준비위원), 光復會(광복회) 理事(이사) 等(등)으로 活躍(활약)하였고, 一九六八年(1968년)에는 建國勳章(건국훈장)이 授與(수여)되었으며, 一九七三年(1973년) 七十二歲(칠십이세)를 一期(일기)로 逝去(서거)하니 光復會葬(광복회장)으로 國立墓地(국립묘지)에 安葬(안장)되었다. 姪(질) 德根(덕근) 亦是(역시) 獨立運動(독립운동)에 加擔(가담)하여 爆彈事件(폭탄사건)으로 尹義士(윤의사)가 現場(현장)에서 逮捕(체포)되자 佛租界(불조계) 內(내) 僑胞(교포)들에게 그 事實(사실)과 避身(피신)할 것을 알리고 돌아 오다가 日警(일경)에 붙잡혀 本國(본국)으로 押送(압송), 二年(2년) 餘(여)의 獄苦(옥고)를 치렀다. 그 또한 一九七七年(1977년) 十二月(12월)에 大統領(대통령) 表彰狀(표창장)이 授與(수여)되었으니, 이 어찌 叔父(숙부)인 先生(선생)의 指敎(지교)로 薰陶(훈도)된 義血家風(의혈가풍)이
[출처] 여름휴가[35]-불갑사 들머리 김 철 선생 기념비|작성자 열린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