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구 충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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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영광군 대마면 화평리 679-1
탐방로그
전남 영광군 대마면 화평리 수촌마을 경당 옆 상산김씨 삼강문 내에 있다. 같은 장소에 아들인 김기봉 선생의 충절비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하여 혈의 그대로 수시반장하고 봉모수절하며 난후에 염습개장하니 향천효열부하다. 한편 기대장은 병권을 김용구장군에게 군무를 위임하고 순창 구수동에 포진중 피체되어 광주형장에서 순국하니 장군은 잔병을 이끌고 전진격전하다가 총상을 입으니 병권을 박도경에게 위임하고 금산 용화산에서 치료중 1918년 12월 21일 고종황제 승하의 비보를 듣고 산상에 올라 북향사배후 음독순절하니 향년 56세로 대마면 수촌전 동?을좌에 반장하였다. 배 함양박씨는 재구의 녀로 생 1자 2녀하니 자는 의사 기봉이요 서는 진주 강대현과 영성 정희수이다. 장군의 절의가 여일병월이나 시세에 구애되어 포양을 보지못하다가 질 기학, 기정, 기선 3형제와 도내 유림의 천장으로 진안 이산묘 영광사에 배향되었으며 정부에서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금자에 영광 김봉렬군수의 애국선열 포양사업으로 삼강문 건립을 추진한바 정부 지원금과 유림의 협찬으로 충절비를 세울세 영광향교 전전교 신종권과 영광 임진수성사적보존회 이사장 이대연과 본손 김근순이 장군의 의적문헌을 제시하며 불초에게 비문을 청하기로 부사어충하고 자사어효하며 부사어열하니 천하 삼강이 진재일문이로다. 불문으로 감불사하고 충효열의 위적을 서술 여우적면에 각명하노니 명왈

옥당골 정기받아 임이나신곳
구국의 횃불들고 일어나신님
회맹소 높은곳에 맹약하셨네
함성도 드높았다 그날의 의병
빛나는 수십여회 떨친 전공에
날뛰던 왜병들도 넋을 잃었네
장군의 애국충절 애달같도다
충절비 세운곳에 영렬계시니
우가는 길손마다 머리숙이네
상산김씨 삼강문
항일의병장 후은 김용구 일가의 충(忠)․효(孝)․열(烈)을 기리기 위해 후은 선생의 생가가 있는 수촌마을에 건립한 것이다.
삼강려기
백두대간의 정기어린 노령산맥의 끝자락 서기내린 태청산하에 물도 멈춘다는 수말골은 상산김씨 문중이 터를 잡아 하늘이 내린 충,효,열이 살아 숨쉬는 명문대가로 가히 만천하에 큰 교훈을 남겼도다. 자고리 어진 어버이는 어진 아들을 낳고, 어진 아들은 어버이를 공경하여 효를 다한다. 이는 물고기가 물없이 살수없듯이 사람은 삼강을 모르면 죽은 목숨과 같다는 만고의 이치를 뜻하는 바 아버지는 나라에 충함이요 아들은 부모에 효로써 도리를 다하며 며느리는 부도로써 수절함이니 이분들의 삶이 바로 인간지도가 아니고 그 무엇이랴. 이 성스러운 삼강려는 부충, 자효, 부열을 되새겨 만인들에게 큰 귀감이 될수 있도록 하기위해 영광군 김봉열군수님의 특별한 관심과 유림및 후손들의 성원과 정성으로 근수되었는바 이는 우리 옥당골의 자랑이요 나아가 참된 충효교육의 장으로 만고일월과 함께 영원하리라.
삼강문이란, 삼강(三綱)에 해당하는 충신, 효자, 열녀가 모두 배출된 집안임을 나타내는 정문(旌門) 또는 여문(閭門)을 말한다.
삼강려(三綱閭)’라는 현판 아래 후은 김용구 선생의 충(忠), 후은의 아들 소파 김기봉(小坡 金起鳳) 선생의 효(孝),
소파의 부인 청송 심씨의 열(烈)을 기록한 3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義兵將後隱商山金公容球忠節碑(의병장 후은 상산김공 용구 충절비)

의병장 후은 상산김공 용구 충절비명
추아 대한민국은 유사이래로 국난이 있을때마다 하늘이 반드시 난을 평정할 충신열사를 배출하였으니 국운의 위기에서도 국가의 보위를 위하여 구원의 손길이 어김없이 내밀어 주신것이다. 한말의 풍운이 어지럽던 서기 1861년 11월 1일 전남 영광군 대마면 화평리에서 구국의 횃불을 밝힌 인물이 나셨으니 곧 의병장 김공이시다. 장군의 휘는 용구요, 자는 유성이며 호는 후은이니 본관은 성산이다. 고려 보윤공 휘 유를 시조로 조선개국 공신 휘 영중구운보의 16대손이요 충간공 휘 덕생의 15대손이며 임진 영광수성 삽혈동맹 55현인 휘 남수의 10손이고 고는 사인 휘 윤택이니 속세 충효례문가이다. 천성이 충의유절한 장군은 기송사선생 문인으로 성리학과 문무경전에 박통하니 국가동량으로 기대되었다. 오라 간신오국과 일본침략으로 을미국변과 을사늑약이 강제체결되자 자택을 의병본거지로 삼아 기밀연락을 주도케하고 인근 사우를 모아 일심계를 창설하여 척왜결의한 후분연탄일조국이 기망하니 지사보국지시라 제창봉기하야 1908년 8월 수백의병이 영광성중 왜적과 초전한 바 병기불비로 패전하니 이에 성재 기삼연과 장성 수련산에 회동하여 호남창의회맹소라 명명하고 삽혈동맹에 등단 서천한후 기삼연을 대장으로 김용구를 부통령에 추대하여 즉일 출전한바 왜적 수백을 포살하니 사기충천하였다. 장군의 진중일기 신담록과 의병사를 고찰해보면 장성 탑정리전 대승, 고창
읍내 적도포살해, 장성 토정리 적병 50여명 사살, 촌치적유 10여명 포살, 영광 오동리전 대승, 구곡산전투 적병 30여명 사살, 홍농 대덕리 적병 퇴치, 무장 상리 적병 퇴치, 선운사 적병 수십명 포살등 전공은 일필난기로다. 장이미재라. 장군의 독자인 기봉은 충의를 겸한 효자로 부친의 진중을 왕래배알하며 참전유공하니 기대장이 만류하며 군은 김문 독자이니 재가보명하며 선계후사하라하였으나 끝내 부친을 도와 흥덕 안현전에서 토적중 전사하니 이시에 부인 심씨는 시모 박씨와 시자매와 같이 심야에 잠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