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찬 순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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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덕촌리 38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순종이 황태자가 된 때 하례은전으로 감형되 귀국했다. 나라가 일제에 병탄된 뒤 재기를 도모하던 중, 1912년 음 9월 18일에 고중 밀서에 병로 전라남도 순무대장에, 그 해 말에 전라남.북도 순무총장이 된 후, 서울서 대한독립 의군부를 만들었고, 1912년 음 12월 27일에 정이품 자헌대부 대한독립의군 원수부 사령총장에 임명됐다. 익년 음 1월 13일에는 아들 응철을 서울로 보내어 거사를 모의케 해, 3월 23일에 8도 전국대표로 독립의군부 조직을 전국에 확대했으나, 어느 동지의 부주의로 탄로 일경에 잡혀 실패했어도, 임의사는 독립의군부 총사령으로 일제의 내각 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등 관원에게 국권 반환요구서를 내고 면대 항변항쟁을 했다. 1914년 6월 3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자결하려고 칼로 목을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달 15일에 거문도에 유배되어 고도 일인촌 폐가에 영금되 일인 만행에 치를 떠는 임의사를, 당시 유지 원세학 공이 신병을 보증하고 서도 덕촌마을로 옮겨, 은밀히 학동들을 가르치고 귤은의 수제자 귤당의 당기를 지었다. 임의사는 1916년 5월 23일 우국충정으로 단식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단기 4330년. 서기 1997년 10월 일
이에 임의사의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향토사가 곽영보는 사료를 모으고, 사단법인 광주 전남사료조사연구회장 남송 신계우 짓고, 춘방 송태경 쓰고, 진남석재 정대훈 파고, 여천군지원과 삼산면장 박종산과 주민이, 순국한 덕촌마을 옆 군의원 임길동 땅에 이 비를 세우다.
임병찬의병장의 순지비는 전남 여수시 삼산면 덕촌리 383에 있다고 했다. 거문도항에서 삼산교를 건너 왼편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한독립군 원수부 사령총장 돈헌 임병찬 의사 순국비
돈헌 임병찬 의사 순지비
본관은 평택으로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임용래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을 배웠으며 39살에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 동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906년 2월 의병장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초모, 군량 및 병사훈련 등의 책임을 맡아 홍주 의병장 민종식과 서로 연락을 맺으면서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지역을 습격하여 관곡을 취해 군량으로 삼고 진용을 정비하였으나 그해 6월 순창에서 최익현과 함께 적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일본헌병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907년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은거하면서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에 따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널리 격문을 발송하고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그 조직을 확대시켜 12월에는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 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의 편제로 재조직하였다. 임병찬 의사는 그 총사령이 되어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총독 이하 모든 관헌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 일제합병의 부당성을 천명하였을뿐 아니라 외국에 대해서도 일제의 통치에 한국민이 불복하고 있음을 표명하는 한편 국민 대중에게 국권회복의 의기를 일으켜 일시에 일제를 축출하려는 항일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해 5월 일본경찰에 의해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임병찬 이하 관련자들이 대거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체포된 후에 옥중에서 계획이 실패됨을 분개하여 3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뒤 6월 13일 거문도로 유배되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은밀히 후학들을 양성하였으며 귤은의 당기를 지은 바 현재 동도 유촌리 귤은사당에 보존되어 오고 있다. 임의사는 1916년 5월 23일(음력) 유배지에서 단식으로 원통한 생애를 마치는 순국을 하여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대한독립의군 원수부 사령총장 돈헌 임병찬 의사 순국비

나라란 슬기와 목숨과 힘으로 지키는 것으로, 이 숭고한 애국을 하다가 여기서 순국한 임병찬 의사의 자는 중옥이고, 호는 돈헌이며, 부모는 용래공과 송악왕씨로 장남인데 조선 철종 2년인 서기 1851년 2월 5일에 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남산제에서 태어나 신동으로 총애를 받고 자란 뒤 일찍 벼슬을 했다.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전후 사재 4천냥과 벼 70섬 등을 내어 구휼을 잘 해, 1899년 선비들의 추천으로 절충장군 중추부첨지사 겸 오위장이 됐다가, 낙안 군수 겸
순천 진관병마동첨절제사가 됐다. 1905년 일본제국의 강제로 을사위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면암 최익현 선생과 호.영남의병 8백을 모아, 태인 무성서원에서 일어나 태인.정읍.순창.곡성을 치고 전주.남원.광주요로를 끊으려고 담양으로 진격 중, 이듬해 6월 1일 일본군과 전주 진위대와 순창 싸움에서 패해 체포됐다. 그로인해 최익현은 3년 임병찬은 2년 감금에 처해, 대마도서 단식하다 면암선생은 순국하고, 임의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