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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대리 137-3
- 탐방로그
- 신안군 장산면 대리 137-3 애국지사 장병준의 묘를 찾았다. 장병준 선생의 묘소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된 것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이곳을 가묘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 인동장공지묘 배 숙인 밀양박씨 부좌
포양 장병준 공은 1893년 6월 10일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에서 인동 장진섭공과 하동정씨의 맏이로 태어나셨다. 일제말기 신안군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않는 가문이라는 기록이 말하듯 공은 태중에서부터 조국광복과 민족자존의 소명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공은 일본에 유학해 일본대 법과를 졸업하셨다. 맘만 먹으면 입신과 영달의 길이 열릴 유학 길이었다. 그러나 공은 분연히 가시밭길을 택하셨다. 공이 유학 후 고향에 돌아왔을때 이땅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렁이고 있던 3.1운동부터가 공을 그냥두지 않았다. 공은 3월 8일 무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셨다. 광무황제 안장식을 거행한다며 장례때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서는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도 벌이셨다. 이 때문에 일경의 체포령이 내리자 공은 그해 4월 상해로 망명하셨다. 공은 곧바로 임시 의정원 전남대표로 선출되고 재정부차장으로 활약하셨다. 공의 뜨거운 열혈 광복운동 앞에서는 대륙도 좁았다. 공은 남북 만주와 시베리아에 흩어져있던 광복단체 지도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이들을 설득한 끝에 모두 상해임정솔하로 통합하는 큰 공을 세우셨다. 부민단 중광단 한족회 신흥회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복군일영... 당시 공에게 설득돼
임정으로 들어온 독립운동단체들의 면면은 공의 활동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듬해인 1920년 2월 공은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셨다. 공은 3.1운동 1주년 기념식때 서태석 표성천 박복영 고재빈 등과 목포 유달산에 태극기를 꽂고 만세를 주동했다가 3월 20일 애통하게도 체포되고 말았다. 공은 경성지법에서 3년 징역형을 받아 복역하셨다.그러나 육신의 환난도 공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공은 출옥 후 송내호 선생과 더불어 신간회를 조직해 다시 구국운동에 나서셨다. 1927년 모든 국내독립운동단체들이 신간회로 통합되면서 전남도지회 부회장 겸 도대표의원을 맡으셨다. 오매불망 광복을 맞이한 이듬해 공은 한민당에 투신 광주지부위원장에 피선되셨다. 좌우대립의 해방정부에서 공은 우익세력의 지도자가 되셨다. 공은 반탁운동 반좌익운동 선봉에서 때로는 청년단체에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는 후원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진시하셨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한민당 배척정책과 한국전으로 한민당 세력이 쇠락해가자 공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셨다. 공은 1957년 야당인 민주당 전남도당위원장이 됐고 같은 해 국민회 전남지회 위원장에 피선되셨다. 60년 3.15 부정선거때엔 참관인으로 참석했다가 자유당원과 경찰에 납치돼 테러를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셨다. 공의 열혈 우국애정은 동생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둘째 동생 병상공은 광주역장과 순천지방 철도청장을 지내시면서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앞장섰던 것이다. 세째 동생 홍재공은 광주학생사건으로 체포돼 옥사하였으며 막내 동생 홍염공은 일제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광복후 제헌국회의원과 2대 국회의원으로 활약한 것도 형의 감화를 받은 것이었다. 독립운동에서부터 반공 반독재에 이르기까지 뜨거운 애국혼으로 일관해 온 공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공은 통일조국을 보지 못하는 통한을 머금은 채 1972년 3월 16일 운명하셨다. 영결식은 3월 20일 광주시민회관에서 사회장으로 엄수됐다.공은 생전인 63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으셨고 80년엔 건국포장 90년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으셨다. 공의 서거 22주기를 맞아 1994년 9월 11일 김석학이 글을 짓고 윤길중이 비제명을 써 전남 신안군 장산면 대리 선영 아래 손자를 대표하여 우범이 비를 세우다.
신안군 장산면 대리 137-3 애국지사 장병준의 묘를 찾아가고 있다.
장병준 선생의 묘소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된 것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이곳을 가묘라고 부르기로 했다.
장병준 선생의 묘소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된 것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이곳을 가묘라고 부르기로 했다.
신안군 장산면 대리 137-3이라는 번지의 주소에는 묘가 몇 기 있었다.
이 봉분 옆에 있는 묘소가 장병준 선생의 묘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