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23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백강 조경한 선생 생가
백강 조경한 선생 생가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6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백강 조경한 선생과 아우이며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한 우청 조옥현 선생의 생가이다. 선생은 전남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238번지(한동마을)에서 옥천조씨 20세 우곡 조정순 선생과 고령신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차남(백강 조경한 : 1900~1993)으로 태어났다. 장남 벽하 조태현(1898~1970), 삼남은 제헌국회의원 우청 조옥현(1903~1950.6. 납북), 사남은 조규현(1905~1950)이다.
선생은 1915년 동래 정동현 여사와 혼인하여 1924년 한곡리 224번지(남측 건너편)로 분가시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선생은 1918년에 만주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단」의 국내지하공작단원이 되어 항일운동을 활발히 하였는데, 특히 서울에 올라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고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장례)일에 수많은 주암면민의 애도회를 선생이 주도하여 광천소재 도리봉산에서 거행하였다. 1927년 2월 고향을 떠나 중국 망명길에 올라 그해 5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만주)에 도착하여 활동무대를 해외로 옮겼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3년간 만주지역에서 왜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100여회 하였는데, 특히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과 쌍벽을 이루는 큰 전투였다. 1933년 연말부터는 활동무대를 임시정부로 옮겼으며 1940년 한국독립당 창당과 광복군 창군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으로 백범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귀국시까지 임시의정원(현 국회)의원, 비서처 부비서장, 국무위원(비서장 겸임)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고, 1963년 순천.승주지역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3년 1월 7일 별세하여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하였고, 묘는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있다.
2019. 12. 백강 조경한 선생 생가복원사업 추진위원회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6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백강 조경한 선생과 아우이며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한 우청 조옥현 선생의 생가이다. 선생은 전남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238번지(한동마을)에서 옥천조씨 20세 우곡 조정순 선생과 고령신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차남(백강 조경한 : 1900~1993)으로 태어났다. 장남 벽하 조태현(1898~1970), 삼남은 제헌국회의원 우청 조옥현(1903~1950.6. 납북), 사남은 조규현(1905~1950)이다.
선생은 1915년 동래 정동현 여사와 혼인하여 1924년 한곡리 224번지(남측 건너편)로 분가시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선생은 1918년에 만주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단」의 국내지하공작단원이 되어 항일운동을 활발히 하였는데, 특히 서울에 올라가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고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장례)일에 수많은 주암면민의 애도회를 선생이 주도하여 광천소재 도리봉산에서 거행하였다. 1927년 2월 고향을 떠나 중국 망명길에 올라 그해 5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만주)에 도착하여 활동무대를 해외로 옮겼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3년간 만주지역에서 왜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100여회 하였는데, 특히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과 쌍벽을 이루는 큰 전투였다. 1933년 연말부터는 활동무대를 임시정부로 옮겼으며 1940년 한국독립당 창당과 광복군 창군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으로 백범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귀국시까지 임시의정원(현 국회)의원, 비서처 부비서장, 국무위원(비서장 겸임)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고, 1963년 순천.승주지역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93년 1월 7일 별세하여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하였고, 묘는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에 있다.
2019. 12. 백강 조경한 선생 생가복원사업 추진위원회
복원 전 원형도
독립운동가 생가터 - 조경한(趙擎韓) 1900~1993 순천 주암 한곡 238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 배달청년회 등에 참여하고, 광복을 맞을 때까지 만주와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한족자치연합회.생육사.동빈현주민회 등의 단체들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홍진.지(이)청천 등과 함께 참여하고 선전위원장에 임명되어 조직 및 훈련 책임을 맡았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한국독립군의 일원으로 중국의 구국군 및 시세영.오의성 부대 등과 연합해 대일항전을 전개하였으나, 1933년 말 한국독립군이 오의성 부대에 포위되어 무장해제 당한 사건으로 연합작전은 중단되었다. 이 무렵 난징에 있던 김구(金九)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잇어 지(이)청천 등과 중국으로 이동하여 낙양군관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교관을 맡아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1934년 3월 만주에서 온 한국독립당과 난징의 한국혁명당의 합당을 추진, 신한독립당을 창당하였다. 또한 신한독립당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해 각 정당.단체의 통합운동에 주력하여 1935년 7월, 5개 정당.단체가 통일을 이룬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다. 민족혁명당에서 김원봉과 마찰로 탈당 후 1937년 4월 지(이)청천.최동오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고, 1937년 8월 민족주의 진영이 결성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서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9년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어 1944년까지 활약하였으며, 1940년 5월 충칭[重慶]에서 민족주의 계열 3당이 통합.창당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주계장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11월 총사령부를 전방지역인 산시성 시안에 설치하면서 총사령부 총무처장 대리를 맡았다. 1943년 국무위원회 부 비서장에 임명되고, 1944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8.15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6대 국회의원, 1981년 독립유공자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공훈을 널리 알리고자 이 표지판을 세웁니다. 2019.11. 순천시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 배달청년회 등에 참여하고, 광복을 맞을 때까지 만주와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한족자치연합회.생육사.동빈현주민회 등의 단체들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홍진.지(이)청천 등과 함께 참여하고 선전위원장에 임명되어 조직 및 훈련 책임을 맡았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한국독립군의 일원으로 중국의 구국군 및 시세영.오의성 부대 등과 연합해 대일항전을 전개하였으나, 1933년 말 한국독립군이 오의성 부대에 포위되어 무장해제 당한 사건으로 연합작전은 중단되었다. 이 무렵 난징에 있던 김구(金九)에게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잇어 지(이)청천 등과 중국으로 이동하여 낙양군관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교관을 맡아 군사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1934년 3월 만주에서 온 한국독립당과 난징의 한국혁명당의 합당을 추진, 신한독립당을 창당하였다. 또한 신한독립당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해 각 정당.단체의 통합운동에 주력하여 1935년 7월, 5개 정당.단체가 통일을 이룬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다. 민족혁명당에서 김원봉과 마찰로 탈당 후 1937년 4월 지(이)청천.최동오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고, 1937년 8월 민족주의 진영이 결성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서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9년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어 1944년까지 활약하였으며, 1940년 5월 충칭[重慶]에서 민족주의 계열 3당이 통합.창당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 겸 훈련부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40년 9월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주계장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11월 총사령부를 전방지역인 산시성 시안에 설치하면서 총사령부 총무처장 대리를 맡았다. 1943년 국무위원회 부 비서장에 임명되고, 1944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8.15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6대 국회의원, 1981년 독립유공자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공훈을 널리 알리고자 이 표지판을 세웁니다. 2019.11. 순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