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건 기념비

4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 산85
탐방로그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 산 85 영흥임원 입구 순국선열 소래 김중건 선생 기념비를 찾아왔다. 하지만 산 85는 너무 넓어서 시간이 걸렸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 377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비원 조성기
이 비원은 순국선열을 경모하고, 거룩한 애국정신을 선양하여 오래 기리고자 영흥군 유지 김명근 회장이 부지를 기증하고 함남도지사, 영흥군민회장 및 군민과 경주김씨 종친 제위의 정성이 결집되어 터 닦고 가꾸어 수비하는 바입니다. 전년 의정부에 세웠던 비에 비단을 다시 갖추어 이곳에 세웁니다. 찬조 인사 방명은 후면에 새겨 둡니다.
순국선열 소래 김중건 선생 기념사업회장 식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 산 85 영흥임원 입구 순국선열 소래 김중건 선생 기념비를 찾아왔다.
하지만 산 85는 너무 넓어서 시간이 걸렸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 377이다.
함경남도 영흥군민회 임원
소래 김중건 선생 기념비

관리번호 15-1-19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지둔리 산85(영흥임원 내)
관리자: 남양주시장과 소래 김중건 선생 기념사업회

소래(笑來) 김중건(金中建) 선생은 철학자요 독립운동 순국선열이다. 특히 미래를 경륜하고 실천하면서 항일 투쟁한 사상가였다. 1889년 12월 6일 함경남도 영흥군 고령면 연동리(古寧面 蓮洞里)에서 경주 김씨로 출생 호는 소래 또는 연산(蓮山), 몰라(沒那), 불폐(不吠) 별호가 원백(元伯)이다. 천품이 기위(奇偉) 신재(神才) 하여 생이지지(生而知之)한다는 칭송받으며 한학을 공부하고 개화혁신과 국권 회복을 결심 1908년 의연히 천도교에 투신 3년에 교리를 연구하면서 자아 철학을 터득 천도교회 월보에 철학논설 등 10여편 발표 후 고향 서실에서 궁구(窮究)하고는 "먹는일이 으뜸[元]이요, 사람다움이 마루[宗]"이라는 원종주의를 주창하고 그 철학인 극원철학(極元哲學) 저술로 '천기대경(天機大經)' 등을 발표 1914년 만주로 망명가서 원종 혹은 대진단(大震團) 이름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동만주 장백의 덕수(德水), 원화동(元化洞), 평강(平岡)과 북만의 팔도 하자(八道河子)에 '원종주의촌'을 건설하여 소공화무국(小共和無國) 촌락을 실현하면서 일제와 맞서 싸웠다. 특히 평강의 개척리에서는 '새바람'이란 기관지를 발간하다가 일본영사관에 검거당하고, 팔도하자에서는 어복촌(魚腹村)이라는 이상향을 건설하였으니 지금도 이상촌이라 이른다.
1933년 3월 24일 재만공산당에게 참살당하니 향년 45세였고 유저가 많았으나 겨우 15편을 건져 '소래짐' 상하권에 담아 펴냈다.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장 포상
笑來 慶州金公 中建 先生 記念碑, 殉國先烈 笑來 金中建 先生의 碑
(소래 경주김공 중건 선생 기념비, 순국선열 소래 김중건 선생의 비)
소래 경주김공 중건 선생은 조국 광복운동의 열사요 희세의 철인이며 육영가이시다. 1889년 12월 6일 함남 영흥군 고령면 연동리에서 출생하여 생이여지하는 신동의 칭호를 들으면서 19세까지 서당과 독학으로 사서오경을 배우고 제자백가를 섭렵하며 서구 신학문에 뜻을 기우려 깊이 탐구타가 청소년을 개화 계몽코자 약관에 향리에다 동명학교를 개설하고 신사조를 고취 훈도하셨다. 21세에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상경하여 천도교에 투신하였다가 2년 뒤에 구국경론으로' 대공화무국론' 제창하셨고 25세부터는 만주에 들어가 독립운동단체인 원종총사를 조직하고 혁명이론을 창도하기 위해 원종을 선포하면서 선호를 건원이라 하
셨다. 미래 동만과 북만 일대를 무대로 항일투쟁에 정신만진하며 혁명이론을 궁구력행하되 때로 대종원부경 등 200여 편의 논술을 저작하였고 혁명투사를 연성하려고 건원학원 등 10여개의 학교를 개설하셨다. 또 항일독립운동의 군량책으로 안도현 구원에다 농장을 개척 운영하되 다복식 농촌주의 정책을 펴셨고 때로는 독립운동단체인 대진단을 결성하여 군장으로 의려를 진작하면서 두만강 연안과 훈춘 일대에서 일군을 섬박하기도 하셨고 누차에 걸쳐 일제에 체포되어 뇌옥의 고난을 겪으셨다. 37세에 이르러 모우회를 조직하고 새바람 잡지를 간행하였으며 41세에는 만주에 산재하던 독립투쟁단체들을 규합하려고 조선혁명 지도처를 결성 주도하셨는데 북만에 창궐하고 있던 조선공산당의 시훼로 1933년 3월 24일 만주 팔도하자 어복촌에서 참해당하였으니 향년 45세로 순국하셨다. 선생은 일로 해박한 석학이요 의연한 혁명이론가이면서 열렬한 독립투사이면서 또한 고원한 이상을 품으신 스승이셨다. 오매불망하시던 조국 광복을 못 보시고 순열하시어 만주황야에 촉루고혼되심이 애닲으나 영전미침의 길이 없다가 1964년에 문하생과 총진들이 회집하여 선생님 불명의 원공을 기리고자 소래 선생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유저를 심구모집하여 소래집 상하권을 발간하였고 외솔회에서는 나라사랑 24호로 김중건 특집호를 간행하였으며 1977년 12월 29일에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포상받으셨다.
1983년 계해 10월 16일 연당 김지남 근찬
1995년 을해 12월 6일 이건 효계 김홍집 근서
건비 위원 조남표 김정걸 김정식 김지남 이종철 김현경 김학경 김지현 김교면 김구경 김정모 이원규 김함경 김남경 김지원 김지호 김지일 김교협 김홍집 김정문 김홍일 김효경 조익형 김호경 김지동 김심경 김교갑
경기도의정부시 신곡동 537의 4번지 계원에 세우다
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면 지둔리에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