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용암리 461-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순천시 상사면 용암리 용암마을 입구 건너편, 박항래 선생 기적비를 찾아왔다.
이 건너편 용암마을이 박항래 선생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다.
이 건너편 용암마을이 박항래 선생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다.
독립운동가 마을 안내판 옆에서 박항래 선생 기적비를 찾았다.
殉國義士 密陽朴公 恒來 紀蹟碑(순국의사 밀양박공 항래 기적비)
殉國義士 密陽朴公 恒來 紀蹟碑(순국의사 밀양박공 항래 기적비)
순국의사 박공 항래 기적비문
조국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박항래의사의 위대한 구국정신을 기리 전하고자 여기에 사적을 새긴다. 박 의사는 1871년 11월 6일 상사면 용암리에서 출생 남다른 정의감과 강적하고 고매한 성품을 지닌 분으로 기미독립운동에 앞장 선 우리 고장의 애국지사이시다. 의사께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갖은 강압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기미년 3.1운동의 여세를 몰아 4월 7일 태극기를 그려 30리 길 순천읍으로 달려가 남문 연자루에 올라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이에 당황한 왜경들이 달려와 의사를 붙들고 심문을 했으나 "나는 대한국민이다. 대한국민으로서 대한독립만세 외친 것이 무슨 죄란 말이냐. 너희는 우리의 우리 국토를 강점하고 국민을 학살하며 재산을 짓밟았으니 그 죄상이야 말로 천벌을 받고도 남음이 있으리라"고 항거하셨다.
의사께서는 10개월의 형을 받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심한 고문끝에 마침내 그해 11월 3일 49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절하신것이다.이분의 고귀한 희생과 구국의 얼이 헛되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도록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박항래의사의 위대한 구국정신을 기리 전하고자 여기에 사적을 새긴다. 박 의사는 1871년 11월 6일 상사면 용암리에서 출생 남다른 정의감과 강적하고 고매한 성품을 지닌 분으로 기미독립운동에 앞장 선 우리 고장의 애국지사이시다. 의사께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갖은 강압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기미년 3.1운동의 여세를 몰아 4월 7일 태극기를 그려 30리 길 순천읍으로 달려가 남문 연자루에 올라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이에 당황한 왜경들이 달려와 의사를 붙들고 심문을 했으나 "나는 대한국민이다. 대한국민으로서 대한독립만세 외친 것이 무슨 죄란 말이냐. 너희는 우리의 우리 국토를 강점하고 국민을 학살하며 재산을 짓밟았으니 그 죄상이야 말로 천벌을 받고도 남음이 있으리라"고 항거하셨다.
의사께서는 10개월의 형을 받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심한 고문끝에 마침내 그해 11월 3일 49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절하신것이다.이분의 고귀한 희생과 구국의 얼이 헛되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도록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순국의사 박공 항래 기적비문
조국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박항래의사의 위대한 구국정신을 기리 전하고자 여기에 사적을 새긴다. 박 의사는 1871년 11월 6일 상사면 용암리에서 출생 남다른 정의감과 강적하고 고매한 성품을 지닌 분으로 기미독립운동에 앞장 선 우리 고장의 애국지사이시다. 의사께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갖은 강압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기미년 3.1운동의 여세를 몰아 4월 7일 태극기를 그려 30리 길 순천읍으로 달려가 남문 연자루에 올라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이에 당황한 왜경들이 달려와 의사를 붙들고 심문을 했으나 "나는 대한국민이다. 대한국민으로서 대한독립만세 외친 것이 무슨 죄란 말이냐. 너희는 우리의 우리 국토를 강점하고 국민을 학살하며 재산을 짓밟았으니 그 죄상이야 말로 천벌을 받고도 남음이 있으리라"고 항거하셨다.
의사께서는 10개월의 형을 받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심한 고문끝에 마침내 그해 11월 3일 49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절하신것이다.이분의 고귀한 희생과 구국의 얼이 헛되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도록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박항래의사의 위대한 구국정신을 기리 전하고자 여기에 사적을 새긴다. 박 의사는 1871년 11월 6일 상사면 용암리에서 출생 남다른 정의감과 강적하고 고매한 성품을 지닌 분으로 기미독립운동에 앞장 선 우리 고장의 애국지사이시다. 의사께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갖은 강압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기미년 3.1운동의 여세를 몰아 4월 7일 태극기를 그려 30리 길 순천읍으로 달려가 남문 연자루에 올라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이에 당황한 왜경들이 달려와 의사를 붙들고 심문을 했으나 "나는 대한국민이다. 대한국민으로서 대한독립만세 외친 것이 무슨 죄란 말이냐. 너희는 우리의 우리 국토를 강점하고 국민을 학살하며 재산을 짓밟았으니 그 죄상이야 말로 천벌을 받고도 남음이 있으리라"고 항거하셨다.
의사께서는 10개월의 형을 받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심한 고문끝에 마침내 그해 11월 3일 49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절하신것이다.이분의 고귀한 희생과 구국의 얼이 헛되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도록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