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3.1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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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269-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독립운동기념탑
3.1독립운동기념탑
낙안 3.1독립운동기념탑

이 탑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 이곳 낙안장터와 벌교에서도 도란사, 이팔사 등 구국결사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왜경에 체포되어 6개월에서 2년 여의 옥고를 치르신 27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르고자 뜻있는 분들의 성금을 모아 1956년 "기미독립운동기념탑"을 건립하였다. 낙안읍성 복원 공사로 인하여 객사 앞에 위치한 탑의 규모가 협소하여, 1998년 낙안 3.1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전 건립하였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신 애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교육의 지표로 삼기 위하여 해마다 이곳에서는 3.1절 기념식 및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성대히 거행되고 있다.
三.一獨立運動 有功者 名單(3.1독립운동 유공자 명단)

건국훈장(建國勳章)- 이병채(李秉埰), 안호형(安鎬瑩), 김종주(金鍾胄), 유흥주(柳興柱), 안용갑(安鏞甲), 전평규(田平奎)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 - 안상규(安尙圭), 안은수(安銀洙), 안규진(安圭晋), 전인채(全仁采), 강정수(姜正洙), 곽인석(郭仁錫), 안진영(安鎭榮), 안덕환(安德煥), 오영태(吳永泰), 申龍石(신용석), 박태문(朴太文), 배윤주(裵潤柱), 배형주(裵炯柱), 김선제(金善濟), 김만득(金萬得), 김규석(金奎錫), 한철순(韓喆順), 한흥량(韓興良), 윤점수(尹點洙), 안응섭(安應燮), 안담환(安潭煥)

위 명단 중, 서훈되지 않은 김만득(金萬得), 한흥량(韓興良),안응섭(安應燮),안담환(安潭煥)은 보훈처 공훈록에서 찾을 수 없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쳐 항쟁한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후손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1956년 이용욱 교장이 발기 지역민들의 성금으로 낙안초등학교(현 객사 앞 광장)에 기념탑을 건립하였으나 규모가 너무 작고 초라하여 뜻있는 분들의 성금과 순천시의 지원을 받아 동탑을 이 곳에 이전 중건하였다.

1998년 2월 일
낙안 3.1독립운동 애국지사 유족회
낙안 3.1독립운동 약사

우리 낙안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인근 21개 면을 관할하던 도읍지였으며 1908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군이 폐지되고 오늘에 이른 문인향이요 충절의 고장이다. 일찌기 이 고장 출신 나철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근택 등 을사5적을 암살하려다 투옥된 독립운동가였고 그의 유지를 받아 이병채 안규휴 안주환 등 많은 유림들은 1910년 4월 일본 내각과 통감부에 격문을 보내어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성토하였고 동년 5월에는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규탄하였었다. 경술국치의 비운을 당한 후에도 이들은 서로 통분한 심회를 달래며 광복의 기회만을 기다리던 중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 고장 유림들도 만세운동 참여를 모의하던 차 서울에서 안호영이 독립선언서 등을 숨겨 고향으로 내려와 4월 2일 이병채 안규휴 안주환 김규석 오병원 김종주 안태섭 동지와 함께 신기마을 뒷산에 모여 오리를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생사를 함께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고 도란사란 구국 결사 단체를 조직한 뒤 4월 3일 안주환은 전평규 안덕환 안용갑 등 33인의 동지를 규합 신기리 김천 근방에 모여(28사)를 조직하였고 4월 4일 김종주는 하송에서 유흥주 배형주 등 6명의 동지를 규합(결사대)를 조직한 뒤 은밀히 내통하여 거사 일시와 장소 등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전평규 등(28사)대원들은 4월 8일 한흥조방에 모여 4월 9일 거사를 재다짐하고 태극기와 조선독립기를 만들었다. 4월 9일 정오 전 대원들은 벌교시장 입구에 모여 회식한 다음 장꾼들 사이 사이에 잠입하여 전평규는 안용갑 안덕환 등과 함께 장꾼들을 향해(지금 조선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니 우리도 동참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자)고 외치며 만세를 선창하니 대원들과 군중들이 호응하여 장터는 만세 인파로 물결쳤고 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으나 출동한 왜경들의 무자비한 총검 앞에 전평규 안덕환 김규석 안진영 강정수 곽인석 전인채 오영태 김만득 한철순 신용석 한흥량 윤점수 안담환 등이 심한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되었다. 한편 김종주와 유흥주는 4월 13일 낙안성 서문 밖에서 배형주 등 4명의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조선독립기를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 안으로 들어가니 장
꾼 150여 명이 합세하였다. 이때 성문 보초병이 그들을 제지하였으나 유흥주가 보초병을 밀어제치는 순간 시위대가 성내로 쇄도하여 수많은 장꾼들과 합세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순찰 중이던 일본 헌병이 총검으로 제지하자 앞에 있던 김종주가(찌를 테면 찔러보라)고 가슴을 내밀며 대들었다. 다급해진 왜경이 칼을 뽑아들자 김종주는 왜병의 칼을 빼앗으려다 그 칼에 부상을 당하여 선혈이 낭자하였다. 그것을 본 아들 김선제와 대원들이 왜병의 총검을 빼앗고 뺏기지 않으려고 저항하던 중 김선제는 그들의 칼에 배가 터지고 유흥주는 오른팔을 배형주 박태문 배윤주는 팔과 머리 등에 심한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되었다. 1차 시위에서 검거를 모면한 안응섭 안용갑은 4월 14일 오전 안규삼 안규진 안은수 안상규 등과 함께 다시 김천 근방에 모여 3차 운동을 모의하고 안규삼은 벌교장에서 포목 1자를 구입하여 대원들과 장꾼들이 보는 앞에서 무명지를 깨물어 혈서로 태극기를 그려 장대 끝에다 높이 달고 시장으로 들어가 장군들과 함께 만세를 고창하니 시장 안은 만세 소리로 물결쳤다. 그때 왜병들이 몰려와 대원들을 포박하려고 하던 순간 육박전이 벌어졌으나 결국 총검으로 무장한 왜병들에게 많은 부상을 입고 포박된 채 끌려가 시장 바닥은 선혈로 얼룩졌었다. 이렇게 3회에 걸친 만세운동으로 대원 25인이 체포되어 6월에서 1년 6월의 형을 받고 투옥되자 안규인 등 26인의 유림들이 다시 혜지사를 조직하여 투옥된 동지들의 뒷바라지와 빈곤한 유가족의 생계를 도왔었다. 이와 같이 우리 고장의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치밀한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니 이 장열한 항쟁의 유훈과 숭고한 얼은 민족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