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조성리 689
- 탐방로그
- 박창규 추모비는 보성군 조성면 조성리 689 조성교회 앞에 있다. 독립운동에 앞장서 온 박창규를 추모하며 당시 그가 시무하던 7개 교회(조성, 덕산, 예동, 회천, 득량, 천치, 유둔교회) 성도들이 힘을 모아서 본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유공자 성암 박창규 장로 추모비
아! 박창규 장로님!! 박 장로님께서 세상을 떠나신지도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읍니다. 이제 우리 교우들이 장로님의 그 숭고한 생애의 편모나마 길이 천추에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우려고 하니 장로님의 그 온화한 얼굴이 눈에 선하게 떠올라 불현듯 추모의 정이 가슴에 설레임을 느끼게 됩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일찌기 서기 1880년 10월 19일에 고흥군 도양읍 관리서 출생 소년 시절에는 한문을 수학하면서 신동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졌으며 삼사십대에는 비범한 기백으로 도양읍 청년회장 진흥회장 도양보통학교 설립 기성회장 등 공직을 역임하면
서 은연 중 민족운동을 펴고 급기야 뜻한 바 있어 기독교를 신봉하고 열열한 신도가 되어 집사 영수장로 등을 거쳐 그 해박한 한학지식과 문필 그리고 뛰어난 인품이 인정되어 순천노회에서 전도사로 임명하여 이곳 조성을 중심으로 덕산 예동 회천득 양천치 그리고 유둔 등 7교회를 순회 시무케 되어 많은 교인들에게 영적 양식을 먹임은 물론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일깨워 왔었는데 1940년 12월에 간악한 왜경에 검속되어 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일본 국체 변혁 등을 선동했다는 죄목의 판결을 받고 1944년 5월까지 5개 성상에 걸쳐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니 육순이 넘은 노령에 그 고초가 오죽하였으리오. 해는 바뀌어 1945년에 갈망하던 조국이 광복되자 독립촉성회 조성면 위원장으로 대한민국 독립 조기 달성에 안간힘을 쓰는 등 각방으로 활약하시다가 1973년 4월 12일에 94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는 바 오호라 석재라. 뉘라서 알았으리오. 그의 심오한 흉중에 불타는 애국정열을 그러나 때를 못 만나 진흙에 묻힌 옥이 되었다가 우리 정부의 혜안으로 발굴되어 1982년 광복절에 독립유공자로 현창되었나니 박 장로님께서 생전에 이런 국가적 우우를 받지 못하심이 무척 한스럽기는 하나 이제라도 그 영광이 길이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요 또한 우리 교회에도 커다란 빛이 됨을 깊이 감사드리온 바 박 장로님께서는 지금 무봉의 천의에 면류관을 쓰시고 저 하늘나라 생명
수 흐르는 화초밭에서 천사들의 아름다운 노래소리가 들리는 낙원을 거닐면서 아마도 회심의 미소를 짓고 게시리라 믿사오며 우리 교우들이 이 불세출의 지사의 공덕을 찬양하고 경건히 비옵나니 박 장로님 이름 위에 길이 영광 더하시고 우리 교회 및 교우들에게 끊임없는 음우를 베푸소서.
1983년 4월 2일 위 일곱 교회 교우 일동 세움
1983년 4월 2일 위 일곱 교회 교우 일동 세움
박창규 추모비는 보성군 조성면 조성리 689 조성교회 앞에 있다.
애국지사 성암 박창규 장로 추모비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을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고 인적, 물적 자원을 강제로 수탈하는 한편 소위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 등 민족정신 말살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박창규 장로님(1880~1973)은 고향인 전남 보성군에서 기독교 교회 전도사로 7개 교회를 시무하면서 1940년 4월 신도들에게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는 우상을 숭배하도록 하여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를 강력히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장로님은 이 일로 인하여 소위 일황불경죄 및 일본 국체 변혁 선동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독립 유공으로 건국포상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에 앞장서 오신 장로님을 추모하며 당시 시무하시던 7개 교회(조성, 덕산, 예동, 회천, 득량, 천치, 유둔교회) 성도들이 힘을 모아 추모비를 세우다.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을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고 인적, 물적 자원을 강제로 수탈하는 한편 소위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 등 민족정신 말살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박창규 장로님(1880~1973)은 고향인 전남 보성군에서 기독교 교회 전도사로 7개 교회를 시무하면서 1940년 4월 신도들에게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는 우상을 숭배하도록 하여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를 강력히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장로님은 이 일로 인하여 소위 일황불경죄 및 일본 국체 변혁 선동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독립 유공으로 건국포상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에 앞장서 오신 장로님을 추모하며 당시 시무하시던 7개 교회(조성, 덕산, 예동, 회천, 득량, 천치, 유둔교회) 성도들이 힘을 모아 추모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