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126
- 탐방로그
- 유림항일사적비는 보성향교 명륜당 앞에 위치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호남은 충의의 상징이요 산양은 절의의 의표라 할지니 보성은 본시 마한의 옛땅으로 백제때는 복홀(伏忽)이라 이름하였고 신라에 에르러 보성이라 명명되었으나 고려에서는 산양이라 했으며 한떄 구주라 하다가 보성으로 복원되어 조선조를 거치어 현금에 이르렀으니 밝다의 뜻을 가진 유서깊은 역사의 고장이로다. 노령산맥이 남쪽으로 뻗어 형성된 제암산을 주봉으로 하고 덕산을 진산으로 하여 죽천을 띠로 하였으니 인산지수의 결국으로 지령한 위에 일찍이 교궁이 마련되어 읍양과 진퇴의 예절을 몸에 익히고 효제와 충신의 덕목을 마음에 배게 훈도하였으니 인걸이 어찌 나리오. 열선루에 음영하고 향촌대에 주사하니 경사를 상거함이 팔백리이나 문물의 빈빈함이 군현에 으뜸이었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보성의 유림의병이 앞뒤하여 봉기 국난에 당하였고 조선조 말기에 일제가 우리강토에 침략하자 임진의병의 전통을 이은 항일의병이 궐기하여 국권회복전에 몸을 바쳐 싸웠으니 보성은 실로 나라의 병번이요 겨레의 구심으로 유학에 바탕한 호국구민의 본이라 기리는도다. 오라 존○토복의 기치아래 혈전한 보람도 없이 마침내 옥사로 국치민욕을 당하였도다 와신상담하던끝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보성의 만세함성은 산천을 흔들어 대한
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도왔으나 일제는 더욱 가혹한 식민통치를 감행아여 한민족의 말살정택에 광분 우리의 고유문화와 미풍양속을 없이 하여 일제에게 노속화하려하여하였다. 3.1운동 이태뒤인 신유년 8월에 일제는 보성향교의 문묘대제에 헌작할 신성한 제주에 까지 저들의 주세령 위반이라하여 봉인하는등의 무례함을 범하자 이에 격분한 유림은 일제세무리를 묽고 고변하여 화형에 처하려하자 대경한 왜경은 참판 박남현을 비롯하여 박태익 박기용 송광면 손용석 문창의 최락구 정덕여 이병문 이병락을 주모자로하여 70여명의 유사를 검거 장흥검찰국에 인금하였도다. 누설의 곤욕중에 처하였음에도 유사들은 늠연히 왜경의 불법 불의함을 꾸짖고 굽힘이 없었도다. 사세가 이에 이르자 박태규 최창순은 보성향교에서 전국 유림 궐기대회를 열어 주세령반대 일본인관리 규탄성토 유림총궐기를 촉구하는 경고 팔도향교문을 전국 향교에 포고하여 동지상합 동성상읃 동의관철의 3동 대의를 천명하고 전국유림의 총궐기를 부르짖어 카다란 호응을 받게되어 이 운동이 전국에 파급되려하자 당혹한 일본제국주의 당국은 긴급히 회의를 열어 1. 구속된 유사의 전원 즉시석방, 2. 각 향교제주는 임의로 양조하여 쓰도록 제세령의 즉시개정 공포 3. 유림이 궐기않도록 ○○한다는 방침을 세워게 되자 구금되었던 유사들이 해빛을 보게되고 전국향교에서는 마음놓고 제주를 빚게되는 개가를 올리게되었도다. 장재하! 보성향교 유림들의 창의항쟁이여 학에 뿌리하고 행에 의로왔으니 유교의 실천철학의 발로요 민족의 주권사상의 응결이었도다 이에 대성지성문선왕의 영이 왕양하게 섭강하시게되니 원향이절의 천도가 밝아지고 인의예지의 인성이 자리잡게되었도다. 조국이 광복된지 마흔세돐을 맞는 이 해에 보성향교에서 항일사적비를 세움에 즈음하여 사관은 삼가 그 대강을 적어 임진의병의 춘추대의적 정적을 이어 항쟁한 보성유림의 푸른 절의와 맑은 지조를 경앙하옵고 민족적 유림항일운동사적의 장절을 국명하여 후세의 뜻깊은 이의 호국적 가감의 사간에 자하고자하는 바이로다.
보성군 보성읍 보성리 126 보성향교 명륜당 앞 유림항일사적비를 찾아왔다.
儒林抗日史跡碑(유림항일사적비)
儒林抗日史跡碑(유림항일사적비)
儒林抗日史跡碑(유림항일사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