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철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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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138-1
탐방로그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138-1에 위치한 나철기념관을 찾았다. 이곳에는 나철 선생이 걸어온 길을 통해 선생의 구국 이념과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고자 건립된 나철 기념관과 선생의 생가가 위치해 있으며,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홍암사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나철 기념관에 왔다면 이 모든 것을 함께 둘러보길 권장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벌교읍 칠동리 138-1 나철 기념관으로 가는 길
오른쪽은 홍암 나철 기념관, 직진하면 홍암 나철 생가, 왼쪽은 홍암 나철 유적지라고 표시된 안내판이 있다.
원래 안내판 왼쪽에 천부경, 초혼비 등의 비석들이 임시로 설치되어 있을 때 만들어진 안내판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비석들이 서재필 기념관 내 홍암사 앞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2023년 기준, 안내판 상 '홍암 나철 유적지'라는 곳에는 아무런 사적이 없다.
벌교읍 칠동리 138-1 나철 기념관
홍암 나철 기념관
홍암나철선생기념관 / 남도의병 무궁화동산 조성

2020.5~6월 보성군에서 산림청 지원을 받아 1억원(국비 50%, 군비 50%)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무궁화나무 계통별 1,025그루를 식재함(홍단심계 349, 청단심계 310, 백단심계 46, 아사달계 6, 배달계 314)

2020. 6. 3.
산림청, 전라남도, 보성군
홍암 나철 기념관

독립운동의 아버지, 국학의 선구자, 대종교 증광자 홍암 나철은 겨레의 큰 스승이다. 홍암나철선생기념관은 나철이 걸어온 길을 통해 선생의 구국 이념과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고자 건립되었다. 선생의 생가와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홍암사, 홍암관과 대종교독립운동관 등 2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암나철 기념관 안내도

① 홍암관 ② 자료실 ③ 대종교 독립운동관 ④ 관리실 ⑤ 나철 선생 유적비 ⑥ 홍암사 ⑦ 금곡마을 복지회관 ⑧ 나철 선생 생가
개천문
입구에 임시 설치되어 있던 비석들이 모두 이곳으로 옮겨져 있다.
天符經(천부경)
天符經(천부경)

一始無始一 析三極無
盡本 天一一地一二人
一三 一積十鉅無 化
三天二三地二三人二
三 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 一妙
衍萬往萬來 用變不動
本本心本太陽 昻明人
中天地一 一終無終一
「선도문화 天符經碑(천부경비)」 건립취지문
한민족사의 으뜸 경전인 「천부경」에는 천.지.인 사상의 입체적 구조가 낱낱이 드러나 있는데, 그 핵심은 '창조.진화' 창조.진화' 創造.進化, '수승화강' 水昇火降, '본성광명' 本性光明, '우아일체' 宇我一體, '영원 永遠 한 생명 生命' 이라는 5대 정신으로 요약된다.
「천부경」을 통하여 천.지.인 사상이 단순한 사변적 논리 조합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게 되고, 나아가 통찰한 내용을 정확하게 현실속에 구현해내는 방식으로 '홍익인간 弘益人間.재세이화 在世理化'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한민족의 선도는 고조선 이후 본질이 왜곡, 민간신앙화 되면서 한국사의 저류로 흘러 들어 갔는데, 오랜 침체기를 거친 후 근대 이래 재차 발아되기 시작하여 점차 그 본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제 한국선도의 부활에 즈음하여 선도의 핵심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천부경비 天符經碑' 81기를 한국선도의 유서 깊은 장소들에 건립하고자 한다.
「천부경」 정신을 통하여 개인이 건강해지고 민족정신이 부활하며, 나아가 모든 인류가 '지구인 정신'으로 하나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선도문화 천부경비국학운동시민연합 기증자 일동 -
천부경 해설문
우주만물은 하나에서 나오고 하나에서 비롯되나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여지기 이전의 하나이며 본래부터 있어 온 하나이다.
하나는 하늘과 땅 과 사람 세 갈래로 이루어져 나오지만 그 근본은 변함도 없고 다함도 없다. 하늘의 본체가 첫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의 바탕으로 땅의 본체가 두 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과 땅을 바탕으로 사람의 본체가 세 번째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변함없는 하나가 형상화 되기 이전의 하늘과 땅 사람의 순서로 완성되면서 새로운 하나를 이룬다. 이 새로운 하나는 한정도 없고 테두리도 없다.
이 새로운 하나가 바로 형상화된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과 형상화된 하늘 땅 사람이 어울리면서 음과 양, 겉과 속, 안과 밖이 생겨난다.
하늘에서는 밤과 낮이 있고, 땅에는 물과 불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남녀가 있어서 이 둘이 조화를 통해 천지는 운행하고 사람과 만물은 성장 발달해 나간다.
이렇듯 하늘과 땅 사람이 원래의 근본상태, 형상화 되기 이전의 상태, 형상화 된 상태, 형상화되기 이전과 형상화된 상태가 어울려 작용하는 상태, 이 네 단계를 거쳐 우주 만물이 완성되니 우주 만물은 본래 따로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다.
이렇게 하나가 묘하게 피어나 우주 만물이 형성되며 그 쓰임은 무수히 변하나 근본은 다함이 없다.
마음의 근본과 우주 만물의 근본이 하나로 통할 때 일체가 밝아진다. 이렇게 마음을 밝혀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들어간 사람을 사늘사람이라고 한다. 우주만물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에서 끝이 나지만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여지기 이전의 하나이며 끝이 없는 하나이다.
국학운동 시민연합 후원명단
구한말 조국의 비운에 수많은 의열사가 일어섰지만 종교문화교육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쳐 빛을 오래 발한 분은 홍암 나철선생이 으뜸일 것이다. 선생은 1863년 계해 11월 2일에 여기 보성땅 벌교읍 금곡마을에서 부 신주 나용집공과 모 청주 한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보성고을은 예로부터 문과 의의 고장으로 이름 났거니와 선생은 일찍 문재를 날려 약관으로 서울에 진출 수년간 운양 김선생 윤식에게 사사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30대에 사관등 문한요직을 거치면서 왕의 상전도 입었스나 을사년 전후에 국운이 날로 기울자 이송척등과 수삼차 도일 동양평화운동에 나섰다. 40대 중반에는 오공기호등과 자신회를 조직하여 오적주살을 꾀하다가 10년유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특사로 풀려나와서는 '국난망이나 도가존'을 믹ㄷ고 독립운동의 지속적 심화를 위하여 보다 근원적인 종교운동에 힘쓰게 되었다. 국조에 귀일하는 민족혼의 수도끝에 1909년(단기 4243) 사유대보름 단군교를 창도 포명하고 이어 대종교로 개명 제1세 교주가 되었다. 이후 경전을 편찬 간행하고 총본사를 백두산 너머로 옮겨 종교와 학교교육을 펴나가니 해외 독립운동의 선봉핵심 구실을 맡게 되어 독립군과 수뇌 김좌진장군, 서일 총재등은 물론 무오독립선언의 대표들이 거의 교인이고 제자들이었다. 또 국내외에 본사, 지사등을 마련하고 종교와 교육일반을 주재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16년 54세된 병진 한가위에 황해도 구월산에서 '천도해명 혈육??'를 탄한 유서와 2대교통을 전수하며 자진순절하였다. 배위 여산 송씨및 이씨정자와 5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가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약 순사하였스며, 특히 정련, 정문 형제분은 종문의 10현으로 꼽히고 뒤에 3부자가 독립유공으로 서훈되었다.
아! 국조와 종교, 천하를 위하여 스스로 순명귀천한 예는 초유의 일이어니와 오래 묻힌 단군전통이 바로 대종사의 중광포명에 따라 길이 민족수호의 대본으로 자리잡게 되었스니 이제 홍익인간적 큰 발양은 민족과 인류의 기본과제가 아닐수 없다. 소생 동향의 인연으로 군당국및 기념사업회측의 청으로 금손 종근씨등의 도움을 받아 이 비문을 엮는다.
구한말 조국의 비운에 수많은 의열사가 일어섰지만 종교문화교육을 통한 민족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쳐 빛을 오래 발한 분은 홍암 나철선생이 으뜸일 것이다. 선생은 1863년 계해 11월 2일에 여기 보성땅 벌교읍 금곡마을에서 부 신주 나용집공과 모 청주 한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보성고을은 예로부터 문과 의의 고장으로 이름 났거니와 선생은 일찍 문재를 날려 약관으로 서울에 진출 수년간 운양 김선생 윤식에게 사사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30대에 사관등 문한요직을 거치면서 왕의 상전도 입었스나 을사년 전후에 국운이 날로 기울자 이송척등과 수삼차 도일 동양평화운동에 나섰다. 40대 중반에는 오공기호등과 자신회를 조직하여 오적주살을 꾀하다가 10년유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특사로 풀려나와서는 '국난망이나 도가존'을 믹ㄷ고 독립운동의 지속적 심화를 위하여 보다 근원적인 종교운동에 힘쓰게 되었다. 국조에 귀일하는 민족혼의 수도끝에 1909년(단기 4243) 사유대보름 단군교를 창도 포명하고 이어 대종교로 개명 제1세 교주가 되었다. 이후 경전을 편찬 간행하고 총본사를 백두산 너머로 옮겨 종교와 학교교육을 펴나가니 해외 독립운동의 선봉핵심 구실을 맡게 되어 독립군과 수뇌 김좌진장군, 서일 총재등은 물론 무오독립선언의 대표들이 거의 교인이고 제자들이었다. 또 국내외에 본사, 지사등을 마련하고 종교와 교육일반을 주재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16년 54세된 병진 한가위에 황해도 구월산에서 '천도해명 혈육??'를 탄한 유서와 2대교통을 전수하며 자진순절하였다. 배위 여산 송씨및 이씨정자와 5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가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약 순사하였스며, 특히 정련, 정문 형제분은 종문의 10현으로 꼽히고 뒤에 3부자가 독립유공으로 서훈되었다.
아! 국조와 종교, 천하를 위하여 스스로 순명귀천한 예는 초유의 일이어니와 오래 묻힌 단군전통이 바로 대종사의 중광포명에 따라 길이 민족수호의 대본으로 자리잡게 되었스니 이제 홍익인간적 큰 발양은 민족과 인류의 기본과제가 아닐수 없다. 소생 동향의 인연으로 군당국및 기념사업회측의 청으로 금손 종근씨등의 도움을 받아 이 비문을 엮는다.
民族獨立指導者 弘巖 羅喆 先生 遺蹟碑(민족독립지도자 홍암 나철 선생 유적비)
개천문
홍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