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 643-3
- 탐방로그
- 염인서 사적비는 안규홍 의병대장의 부대장이었던 염재보 선생의 생가 마을 입구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병장 파주 염공 재보 사적비
義兵將坡州廉公在輔의 字는 仁瑞요 籍은 坡州이다. 公은 일찌기 一八六八年 李朝高宗 戊辰十二月 二十四日에 湖南寶城 內洞에서 태어났다. 公은 젊었을 때부터 軀幹이 壯大하고 志氣가 慷慨하여 술과 사냥을 좋아 하였으며 武藝에 精通하였다.
一八九六年丙申에 崔益鉉, 林炳燦등이 湖南에서 起義하여 실패하였을제 公은 山野의 豪傑을 규합하여 一九○八年戊申에 이르러 드디어 義兵을 일으켜 孫德五, 鄭琪贊 등과 더불어 安圭洪을 主將에 推戴하고 公은 左右砲將이 되었으니 때는 純宗二年 이었다. 이해 三月에 擧事하여 石虎山과 桐巢山에서 두차례나 호軍할제 다음과 같이 軍令을 내렸다. 禁軍이 우리백성을 討索하여 出境하는 곡식을 금지하니 여러고을 派員중에 간특한자는 죽일것이며 州里중에 苛 苛斂誅求를 자행하는자는 잡아 다스려 먼저鬼를 죽이고 다음에 外賊을 섬멸시켜 우리 邦本과 國脈을 지키리라.
곧 進軍하여 鳥內에 이르러 犯令한 派員을 죽이고 賊將 永戶久雄을 巴靑에서 섬멸하여 鹵獲한바 많았고 大原寺로 돌아왔을 때 뒤쫓아온 憲兵을 또 물리쳤다. 四月에는 內加嶺峙에서 四賊을 죽이고
一八九六年丙申에 崔益鉉, 林炳燦등이 湖南에서 起義하여 실패하였을제 公은 山野의 豪傑을 규합하여 一九○八年戊申에 이르러 드디어 義兵을 일으켜 孫德五, 鄭琪贊 등과 더불어 安圭洪을 主將에 推戴하고 公은 左右砲將이 되었으니 때는 純宗二年 이었다. 이해 三月에 擧事하여 石虎山과 桐巢山에서 두차례나 호軍할제 다음과 같이 軍令을 내렸다. 禁軍이 우리백성을 討索하여 出境하는 곡식을 금지하니 여러고을 派員중에 간특한자는 죽일것이며 州里중에 苛 苛斂誅求를 자행하는자는 잡아 다스려 먼저鬼를 죽이고 다음에 外賊을 섬멸시켜 우리 邦本과 國脈을 지키리라.
곧 進軍하여 鳥內에 이르러 犯令한 派員을 죽이고 賊將 永戶久雄을 巴靑에서 섬멸하여 鹵獲한바 많았고 大原寺로 돌아왔을 때 뒤쫓아온 憲兵을 또 물리쳤다. 四月에는 內加嶺峙에서 四賊을 죽이고
또 雲月峙에 白衣疑兵을 설치하여 同福憲兵을 쳐서 斬獲한바 많았으나 我軍 또한 被害가 적지 않았으므로 棲鳳山으로 退陣하여 賊에게 陷沒되었다.
七月에 다시 石虎에 모였는데 賊將 渡邊廷秋가 圓峯에 駐屯하고 順天憲兵과 交通하여 鞍峙로부터 闖入하였다. 公은 安圭洪과 함께 殘兵을 수습하여 上眞山에서 憲兵을 무찌르고 渡邊을 圓峯에서 奇襲하여 兵廳을 불태우매 渡邊은 長興으로 도주하였다. 九月 十三日에 順天憲兵과 外加嶺峙에서 싸웠고 十一月에 興陽憲兵廳을 내친뒤 長水洞에서 호軍하고 十二月에는 同福憲兵廳을 기습하려 하였으나 軍機가 漏洩되어 이루지 못 하였다.
이듬해 己酉二月에는 長興稅務監督을 逐出하고 賊兵과 싸워 勝利를 거두었다. 그때 公은 母喪을 당하였으나 곧 起復하였고 四月에 柳德三에게 命하여 福內에 潛入하여 三倭一譯을 椎殺하고 또 後軍將 李京三을 보내 賊兵을 박谷에서 습격하여 그 隊長 平井灘市를 베였다.
六月에 興陽憲兵과 싸웠으나 不利하였고 八月에 이르러 賊이 二聯隊 數千名을 풀어 兵站을 설치하고 義兵을 수색 虐殺하였으니 赤手空拳인 孤軍殘率로서는 버티기에 어렵게 되었었다. 二十日에 公과 安圭洪, 孫德五, 鄭琪贊등이 모두 被逮되어 光州監獄에 수감 되었다가 이듬해 庚戌三月에 大邱로 移監되어 安公은 五月에 먼저 被殺되었고 公과 孫, 鄭 二公은 六月十二日에 絞首刑을 함께 받았으니 公의 享年은 四十二歲요 遺骸는 이듬해 辛亥에 故山에 返葬되었다.
公의 家系는 始祖 高麗三韓功臣 大司徒邢明과 孝文公信若과 忠靖公承益과 曲城府院君 忠敬公悌臣은 모두 名宦이요 十世祖 靖陵參奉 浩에 이르러 寶城에 移居하엿다. 大考는 梅菊堂 相龍이요 皇考는 范煥이요 本生考는 晩溪 鍾煥이요 세 아들은 守鈺 勝鈺 準鈺,이요 손자는 喆浩 東洙 啓洙이다.
寶城은 濱海의 窮鄕이요 公은 하나의 農家의 아들에 지나지않은 身分이었으나 爲國殉身한 行蹟은 실로 거룩하였다. 公은 殉國한지 몇 달되지 않아 祖國은 淪亡하였으나 마침내 一九四五年丁巳에는 公에게 建國褒章이 追敍되었다. 이제 後孫이 이 事蹟碑를 세워 公의 精忠懿蹟을 千秋에 길이 전하려할제 宗人南燮을 보내어 나에게 銘을 청한다 公의 從兄 在業의 撰한 行錄과 獨立運動史 寶城鄕土誌등을 참고하여 簡明히 敍述하고
七月에 다시 石虎에 모였는데 賊將 渡邊廷秋가 圓峯에 駐屯하고 順天憲兵과 交通하여 鞍峙로부터 闖入하였다. 公은 安圭洪과 함께 殘兵을 수습하여 上眞山에서 憲兵을 무찌르고 渡邊을 圓峯에서 奇襲하여 兵廳을 불태우매 渡邊은 長興으로 도주하였다. 九月 十三日에 順天憲兵과 外加嶺峙에서 싸웠고 十一月에 興陽憲兵廳을 내친뒤 長水洞에서 호軍하고 十二月에는 同福憲兵廳을 기습하려 하였으나 軍機가 漏洩되어 이루지 못 하였다.
이듬해 己酉二月에는 長興稅務監督을 逐出하고 賊兵과 싸워 勝利를 거두었다. 그때 公은 母喪을 당하였으나 곧 起復하였고 四月에 柳德三에게 命하여 福內에 潛入하여 三倭一譯을 椎殺하고 또 後軍將 李京三을 보내 賊兵을 박谷에서 습격하여 그 隊長 平井灘市를 베였다.
六月에 興陽憲兵과 싸웠으나 不利하였고 八月에 이르러 賊이 二聯隊 數千名을 풀어 兵站을 설치하고 義兵을 수색 虐殺하였으니 赤手空拳인 孤軍殘率로서는 버티기에 어렵게 되었었다. 二十日에 公과 安圭洪, 孫德五, 鄭琪贊등이 모두 被逮되어 光州監獄에 수감 되었다가 이듬해 庚戌三月에 大邱로 移監되어 安公은 五月에 먼저 被殺되었고 公과 孫, 鄭 二公은 六月十二日에 絞首刑을 함께 받았으니 公의 享年은 四十二歲요 遺骸는 이듬해 辛亥에 故山에 返葬되었다.
公의 家系는 始祖 高麗三韓功臣 大司徒邢明과 孝文公信若과 忠靖公承益과 曲城府院君 忠敬公悌臣은 모두 名宦이요 十世祖 靖陵參奉 浩에 이르러 寶城에 移居하엿다. 大考는 梅菊堂 相龍이요 皇考는 范煥이요 本生考는 晩溪 鍾煥이요 세 아들은 守鈺 勝鈺 準鈺,이요 손자는 喆浩 東洙 啓洙이다.
寶城은 濱海의 窮鄕이요 公은 하나의 農家의 아들에 지나지않은 身分이었으나 爲國殉身한 行蹟은 실로 거룩하였다. 公은 殉國한지 몇 달되지 않아 祖國은 淪亡하였으나 마침내 一九四五年丁巳에는 公에게 建國褒章이 追敍되었다. 이제 後孫이 이 事蹟碑를 세워 公의 精忠懿蹟을 千秋에 길이 전하려할제 宗人南燮을 보내어 나에게 銘을 청한다 公의 從兄 在業의 撰한 行錄과 獨立運動史 寶城鄕土誌등을 참고하여 簡明히 敍述하고
뒤에 銘을 붙인다.
한나라의淪亡이란 어느때나 있다하나 帝韓이무너질젠 그슬픔 그지없도다 外夷가 스며들때 內賊이 문을여니 나라만 무너지랴 온겨레가 멸망토다.. 오흡다廉仁瑞公 밭집의아들로서 悲憤을 못견디어 진칼짚고 일어서니 沖天하는 義氣는 가을하늘 새맬러라 民衆의피를빠는 장鬼들을 먼저베고 殘暴한 倭놈들 목덜미에 도끼질을 높은메 바다구비 전쟁터로 변했도다 나라를 잃은 슬픔 겪은 苦痛 三十六年 祖國이 光復되니 公에게도 建國褒章 이제 또 이빗돌에 아름다운 行蹟 새기니 밝은 靈은 굽어보고 웃음을 지으시리.
출처 : 파주염씨 사이트
한나라의淪亡이란 어느때나 있다하나 帝韓이무너질젠 그슬픔 그지없도다 外夷가 스며들때 內賊이 문을여니 나라만 무너지랴 온겨레가 멸망토다.. 오흡다廉仁瑞公 밭집의아들로서 悲憤을 못견디어 진칼짚고 일어서니 沖天하는 義氣는 가을하늘 새맬러라 民衆의피를빠는 장鬼들을 먼저베고 殘暴한 倭놈들 목덜미에 도끼질을 높은메 바다구비 전쟁터로 변했도다 나라를 잃은 슬픔 겪은 苦痛 三十六年 祖國이 光復되니 公에게도 建國褒章 이제 또 이빗돌에 아름다운 行蹟 새기니 밝은 靈은 굽어보고 웃음을 지으시리.
출처 : 파주염씨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