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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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581
탐방로그
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관 바로 옆에 김구 은거지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백범 김구선생 은거 추모비
기쁘도다 이 붓을 듦이여!

민족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이시며 겨레의 큰 스승이신 선생께서 이곳에 은거하신지 어언 108년이 되는 오늘 그분 행적의 일단을 새기게 됨에 어찌 기쁘지않으리오. 명성황후 살해만행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회를 엿보던 선생께서는 치하포에서 변장한 일본군 첩보장교 중이 스치다(土田)를 맨손으로 처단하시고 사형을 언도받아 집행되기직전 고종황제의 사전으로 사형집행정지의 상태로 인천감옥에서 복역중 나를 죽이려는 놈은 왜놈뿐인데 내가 그들을 위해 죽어야하나 생각되어서 탈옥을 감행하셨다. 탈옥후 피신길을 택한 선생께서 목포, 완도, 장흥등을 거쳐 이곳에 일가들이 집성촌 한마을이 있음을 알고 찾아오시니 1898년 음력 5월 무더운 어느날이었다. 당시 문사일을 보던 김승묵(자 광언)은 김두호라고 칭한 젊은과객을 반갑게 맞아 들였다. 33세의 젊은 선생은 10여살 위인 윗행렬들과 동유하며 학문과 세태등을 논하였으니 주로 광언, 덕은, 사중 및 선씨등이었다. 선생께
서 지니셨던 동국역대라는 책으로 우리 역사를 알리셨고 뒷산 바위위에 오르시어 초동들에게 체조를 지도하시기도 하고 바위틈을 흐르는 개울물에 멱을 감기도 하셨다. 광언의 부인을 따라 밭에가 콩을 뜯어다 죽을 쑤어 끼니를 때우시기도 하셨다. 달포여를 머문 선생께서 떠나면서야 내가 일본놈 한명을 죽이고 피해다닙니다 하며 광언의 어린 두아들을 서울 신식학교에 보낼것을 권하셨으나 승락을 얻지못했다. '이별난'이라는 시를 남기시고 언젠가 이시를 보며 제생각을 하실거라며 후일을 기약하고 살아있다면 꼭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하시고, 말년에 몸이 불편해진 광언은 어린 손자인 두회를 데리고 지내면서 그 두호라는 청년이 범상치않아 보였는데 아무 소식이 없구나하시면서 같이 지냈던 얘기를 자주해 주셨다. 광복을 맞아 환국하신 선생은 독립촉성회 보성지회를 통해 그 옛날 함께했던 분들이나 그 자손들이 기거하고 있는지를 물어오셨다. 동유하던 분들은 모두 타계하시고 그자손들이 있음을 전해들은 선생께서는 광언의 종손인 기옥에게 간절한 정이 담긴 사신을 보내오시어 지금껏 소중히 보관중이다. 광언의 차자인 재인으로 하여금 경교장을 찾게한 선생께서는 심심한 감사의 말씀과 함께 대형 존영을 온마을 가가호호에 친필서명하여 보내주시니 감개무량하였다. 선생의 전국일주시에는 전동민이 이곳 도로에 솔문을 세우고 환영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던바 옛날 그마루에 앉아 그후손들과 담소하시는 선생의 눈은 젖어 있었다. 그 옛날 근 두어달을 농사철에 폐를 끼쳤다하시며 그후에 소식을 전하지 못한 미안함, 큰 흉년이라 콩잎죽을 쑤어 먹었던일, 시원한 목욕, 더맛있었던 동천샘물등 추억을 쏟아 내셨다.재인등으로 경교장을 다시 찾게 하시고는 친필휘호를 내리셨고 옛날 떠날때 필묵을 선물한 선씨가족에게 후사하셨다. 선생의 국민장시에는 족제인 창회가 신을 도와 일가의 정을 깊게 하셨다. 1990년에야 마을앞에 은거비를 세웠다. 이제 이곳에 기념관을 세우고 그 사실을 돌에 새
김에 이곳을 찾는 모든이들이 선생의 위대한 나라사랑 정신을 영원히 자자손손 이어나가 조국통일과 완전 자주독립 번영의 길에 동참진력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기념관 건립 경위

백범선생께서 1898년 5월 이곳에서 달포여를 일가의 정으로 은거하시다 떠나시어 모진 간난을 겪으시며 조국광복과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광복후 다시 이곳을 찾으신지 반세기가 넘었다. 그동안 우리 주민들은 선생의 애국애족 민주정신을 흠모하여 살아오고 있어니와 특히 남쪽에서는 기거하신곳이 경교장 다음으로 긴곳이었음을 자랑으로 여겨왔다. 1990년에야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조그만 은거비를 세웠으나 그 규모가 초라함을 어쩔수 없었다. 2005년 보성군 현안사업 건의시 주민들의 뜻을 모아 본마을 태식이 은거기념관건립의 필요성을 의함에 다행히도 전라남도의 배려로 예산이 책정되어 본 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 주민들은 본 사업을 이룰수 있게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본 기념관을 꾸준히 갈고닦아 영원히 발전시켜갈것을 다짐한다.
離別難(이별난)

백범 김 구

離別難離別難(이별난이별난) 離別難處花樹開(이별난처화수개) 花樹一枝分折半(화수일지분절반) 半留宗家半帶行(반유종가반대행)
生我天地逢何時(생아천지봉하시) 捨此江山去亦難(사차강산거역난) 四員同遊至月餘(사원유지월여) 齟齬惜別而去也(저어석별이거야)
日後見此或可思(일후견차혹가사) 餘否耶遺此表情(여부야유차표정) 悠悠而去也(유유이거야)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
白凡 金龜 先生 隱居 記念館
Kim Koo's Seclusion Memorial Hall
700m→

위와 같은 안내판이 있으나, 잘못된 표시이다.
본 안내판이 있는 곳으로부터 약 1.5km 이상 가야 한다.
김구 선생 은거의 집
金龜 先生 隱居의 집
The Shelter of Gim Gu →
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