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남악리 2286
- 탐방로그
- 전라남도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전라남도도립도서관 건너편, 무안군 삼향읍 남악리 2286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전라남도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전라남도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전라남도 독립운동의 역사
망국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해 남도의 우국지사들은 "조선에 살고 조선에 죽자"고 호소하며 대한제국 시기 의병 항쟁을 주도하였다. 1896년 3월 20일. 전라도 최초의 의병이 장성에서 일어났다. 노사학파(蘆沙學派)의 대표였던 기우만은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것은 신민(臣民)의 직분'이라 천명한 후 나주와 광주 등 여러 고을의 호응을 받아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를 결성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기삼연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의병장들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여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으로 전라남도 각지에 의병근거지를 구축하여 장기 항전을 감행함으로써 '남도의병이 으뜸'이라 널리 알려졌다. 또한 나철 오기호 등은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5적의 응징에 앞장섰으며 이들은 1909년에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하여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경술국치의 치욕을 씻기 위해 남도 사람들은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고 광복회(光復會)에 가담하여 1910년 대 국내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일제가 총칼로 지배한 지 10년 만에 우리 민족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3.1운동을 전개하였다. 전라남도 20여 개 군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조선의 독립을 열망한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일제의 지배 정책이 더욱 간교해진 1920년대 후반 나주와 광주의 청년 학생들이 "식민지 차별 교육 철폐" "조선인 본위 교육" 등을 외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메아리가 전국은 물론 해외까지 울려 퍼져 최소 280개 학교의 5만 4천여 명이 호응하였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만주와 중국 그리고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침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도 사람들은 군국주의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며 대동단결하여 신간회 운동을 비롯한 농민, 노동, 여성, 청년, 종교운동을 전개하여 광복을 염원하였다. 1933년 황동윤 김홍배 등은 1920년 대농민운동의 전통을 혁신하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를 결성하였다. 당시 농어민들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민족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활약하다 1938년에 588명이 검거되었다. 이 무렵 광주 서중학교 학생들은 무등회(無等會)를 조직하여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저항하며 조선어 사용 운동을 펼이다가 1943년에 약 350명이 체포되었다. 해외에서는 중국에서 김철을 비롯한 조경한 나월환 정율성 미국에서는 서재필 등이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이처럼 남도 사람들은 소안도에서 지리산까지 그리고 해외의 이역만리에서도 광복의 그날을 위해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의 단심(丹心)이었다. 조국의 광복은 물론 미래의 "대한민국은 아시아 동쪽에 우뚝 서서 세계만방에 기상을 떨칠 것"이라 굳게 믿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45년 8월 15일 이 땅에서 의병을 일으킨 지 꼭 50년 만에 나라를 되찾았다. 남도의 독립운동 영령들이시여 광복 75년이 되어서야 이 기념비를 세운 못난 후손들을 용서하시고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영원하도록 도와주소서.
2020년 광복절 홍영기 전 순천대학교 인문예술대학장 짓고 금초 정광주 쓰다
망국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해 남도의 우국지사들은 "조선에 살고 조선에 죽자"고 호소하며 대한제국 시기 의병 항쟁을 주도하였다. 1896년 3월 20일. 전라도 최초의 의병이 장성에서 일어났다. 노사학파(蘆沙學派)의 대표였던 기우만은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것은 신민(臣民)의 직분'이라 천명한 후 나주와 광주 등 여러 고을의 호응을 받아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를 결성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기삼연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의병장들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여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으로 전라남도 각지에 의병근거지를 구축하여 장기 항전을 감행함으로써 '남도의병이 으뜸'이라 널리 알려졌다. 또한 나철 오기호 등은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5적의 응징에 앞장섰으며 이들은 1909년에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하여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경술국치의 치욕을 씻기 위해 남도 사람들은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고 광복회(光復會)에 가담하여 1910년 대 국내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일제가 총칼로 지배한 지 10년 만에 우리 민족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3.1운동을 전개하였다. 전라남도 20여 개 군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조선의 독립을 열망한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일제의 지배 정책이 더욱 간교해진 1920년대 후반 나주와 광주의 청년 학생들이 "식민지 차별 교육 철폐" "조선인 본위 교육" 등을 외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메아리가 전국은 물론 해외까지 울려 퍼져 최소 280개 학교의 5만 4천여 명이 호응하였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만주와 중국 그리고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침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도 사람들은 군국주의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며 대동단결하여 신간회 운동을 비롯한 농민, 노동, 여성, 청년, 종교운동을 전개하여 광복을 염원하였다. 1933년 황동윤 김홍배 등은 1920년 대농민운동의 전통을 혁신하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를 결성하였다. 당시 농어민들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민족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활약하다 1938년에 588명이 검거되었다. 이 무렵 광주 서중학교 학생들은 무등회(無等會)를 조직하여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저항하며 조선어 사용 운동을 펼이다가 1943년에 약 350명이 체포되었다. 해외에서는 중국에서 김철을 비롯한 조경한 나월환 정율성 미국에서는 서재필 등이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이처럼 남도 사람들은 소안도에서 지리산까지 그리고 해외의 이역만리에서도 광복의 그날을 위해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의 단심(丹心)이었다. 조국의 광복은 물론 미래의 "대한민국은 아시아 동쪽에 우뚝 서서 세계만방에 기상을 떨칠 것"이라 굳게 믿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45년 8월 15일 이 땅에서 의병을 일으킨 지 꼭 50년 만에 나라를 되찾았다. 남도의 독립운동 영령들이시여 광복 75년이 되어서야 이 기념비를 세운 못난 후손들을 용서하시고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영원하도록 도와주소서.
2020년 광복절 홍영기 전 순천대학교 인문예술대학장 짓고 금초 정광주 쓰다
건립취지문
전라남도 사람들은 예로부터 의(義)를 높이 우러르며 소중하게 여겨왔다. 특히 국난(國難)에 처할 때마다 분연(奮然)히 떨쳐 일어나 구국(救國)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멀리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조선 말 국가가 국민을 포기했을 때, 군(軍)이 국민을 보호해 주지 못했을 때도 전남 사람들은 의병이란 이름으로 치열한 항일전쟁(抗日戰爭)을 벌였다. 근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일본 군대에 맞서 선비는 한 손에 붓을 또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싸웠으며 무기를 구하지 못한 백성들은 농기구를 들고 항전(抗戰)에 참여했다.
1896년부터 1910년대까지 계속된 전라도 의병은 한말 의병 전쟁을 주도하였다. 이에 놀란 일제는 전라도 의병을 두고서는 침략의 야욕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라 명명된 의병 대학살 작전을 자행하였다. 엄청난 희생으로 전라도는 황폐화 되었지만 그 불굴의 항일 독립 정신은 독립군을 잉태시켰고 독립군은 조선의용군과 광복군의 모태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국내 최대 독립 운동으로 꼽히는 나주·광주학생독립운동, 의열투쟁, 노동·농민·계몽운동 등 이 지역의 크고 작은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후의 3.15 의거와 4.19혁명, 5.18 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청사에 길이 남을 민주화 운동 또한 전남 사람들의 항일 독립 정신이 낳은 위대한 유산이다. 우리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스스로 일어나 일제와 맞선 전남 사람들의 독립 정신이 국민정신으로 승화되길 염원하며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 지역민들의 숭고한 항일독립운동을 영원히 새기고 기리기 위해 이 탑을 세운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 김영록 전라남도지사 국회 장병원 서삼석 의원을 비롯한 전라남도, 전남서부 보훈지청의 지원이 있었다.
2020년 광복절 김갑제 짓고 정광주 씀
전라남도 사람들은 예로부터 의(義)를 높이 우러르며 소중하게 여겨왔다. 특히 국난(國難)에 처할 때마다 분연(奮然)히 떨쳐 일어나 구국(救國)의 횃불을 높이 들었다. 멀리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조선 말 국가가 국민을 포기했을 때, 군(軍)이 국민을 보호해 주지 못했을 때도 전남 사람들은 의병이란 이름으로 치열한 항일전쟁(抗日戰爭)을 벌였다. 근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일본 군대에 맞서 선비는 한 손에 붓을 또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싸웠으며 무기를 구하지 못한 백성들은 농기구를 들고 항전(抗戰)에 참여했다.
1896년부터 1910년대까지 계속된 전라도 의병은 한말 의병 전쟁을 주도하였다. 이에 놀란 일제는 전라도 의병을 두고서는 침략의 야욕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라 명명된 의병 대학살 작전을 자행하였다. 엄청난 희생으로 전라도는 황폐화 되었지만 그 불굴의 항일 독립 정신은 독립군을 잉태시켰고 독립군은 조선의용군과 광복군의 모태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국내 최대 독립 운동으로 꼽히는 나주·광주학생독립운동, 의열투쟁, 노동·농민·계몽운동 등 이 지역의 크고 작은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후의 3.15 의거와 4.19혁명, 5.18 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청사에 길이 남을 민주화 운동 또한 전남 사람들의 항일 독립 정신이 낳은 위대한 유산이다. 우리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스스로 일어나 일제와 맞선 전남 사람들의 독립 정신이 국민정신으로 승화되길 염원하며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 지역민들의 숭고한 항일독립운동을 영원히 새기고 기리기 위해 이 탑을 세운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 김영록 전라남도지사 국회 장병원 서삼석 의원을 비롯한 전라남도, 전남서부 보훈지청의 지원이 있었다.
2020년 광복절 김갑제 짓고 정광주 씀
광복군
194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활약한 광복군상
194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활약한 광복군상
3.1운동
1919년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삼일운동에 참여한 여학생상
1919년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삼일운동에 참여한 여학생상
농민운동
1920년대 지주소작제의 개혁을 부르짖은 농민운동에 가담한 농민상
1920년대 지주소작제의 개혁을 부르짖은 농민운동에 가담한 농민상
한말의병
1900년대 전후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한말의병상
1900년대 전후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한말의병상
독립의군부
1910년대 국내항일운동의 대명사 독립의군부 및 광복회의 단원상
1910년대 국내항일운동의 대명사 독립의군부 및 광복회의 단원상
학생운동
1929년 조선인본위교육과 식민지노예교육의 철폐를 외친 학생운동에 참여한 여학생상
1929년 조선인본위교육과 식민지노예교육의 철폐를 외친 학생운동에 참여한 여학생상
사회운동
1930년대 국내 최대의 항일조직 전남운동협의회의 회원상
1930년대 국내 최대의 항일조직 전남운동협의회의 회원상
전라남도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전라남도 항일독립운동기념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