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순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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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산26-3
탐방로그
고광순 사적비가 있던 창평면 유천리 산 26-3는 예전 포의사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 포의사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 22-1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최후까지 응전하다가 장렬히 순국하니 강의 1년 정미 서기 1907년 9월 11일 향년은 60세 였다.
그날 동지 ???공이 공의 몸을 솔가지로 덮어 보호했었고 다시 매천 황현 공이 와서 통곡하며 봉분을 지었다가 이듬해 4월 반장하는 길가에는 고을마다 울음소리 의열공 무덤 곁에 안장하고 1년뒤에 부인 금성 오씨를 합장
재항, 재홍 두 아들은 일찍 여의고 사위는 행주 기산도요 광훈의 아들로써 대를 잇게 한 뒤 세월은 흘러 무릇 60년 헤아리건대 그 어른들의 공로로 광복된 오늘이라 나는 노래로써 찬양하고 그 큰 뜻을 천추에 전하려 한다.
의를 보고 몸을 버림은 종종기에 침놓는것같고 이익따라 몸을 달림은 도둑과 같다 하셨네
???님의 발자취 어느적에 사라지리까 그뜻 그 이름 이 겨레하? 만고에 전하리라
의병대장 녹천 고광순공 사적비
의병대장 녹천 고광순공 사적비

조국과 정의를 위해 몸은 적탄 아래 쓰러졌어도 뜻과 이름은 이 나라 역사와 함께 길이 갈 의병대장 녹천 고광순 공.
공의 자는 서백이요 조상은 일찍 탐라로부터 나왔고 됫날 검교 복림공 때로부터는 장흥으로써 본관을 삼았으며 저 임진란 때 순국한 충열공 제봉 경명 맏아들 효열공 준봉 종후, 둘째 아들 의열공 학봉 인후 등 세 분이 뛰어났는데, 의열공의 10세손 경주공에 이르러 자식이 없으므로 족형 정상공의 아들로써 대를 이으니 그가 바로 공이었으며 어려서 글을 읽으면 반드시 뜻을 찾았고 젊어 과거를 보러 갔으나 불?함을 개탄하고 다시는 응하지 아니하더니 40세 을미년에 국모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자라의 원수를 갚고자 격문을 뿌려 의사들을 불러 모았다.
남원의 송사 기우만 공과 더불어 광주에서 명?하여 맹?짓고 나주로 들어가 곧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세울 즈음 조정의 명령이 내려와 부득이 해병하기는 했으나 ???영호를 두루 돌며 일편단심 동지들을 얻기에 애썼는데 그 중에서도 족조 인봉 제량 공과 의기가 서로 의기가 맞아 일을 같이 꾀하여 고락을 함께 할수 있음을 기뻐했었다.
다시 10년을 지나 58세 을사년에 이르러 마침내 망국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는 ??함을 더 참을 길 없어 이듬해 4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순창으로 들어가므로 공은 그곳으로 찾아 갔던 바 면 옹은 이미 체포되어 갔으며 또 기우만, ??? 제공을 만나 다시 일어날 것을 기약하고 돌아왔으나 불행히 그들마저 체포되고 말았다.
그랬으나 공은 더욱 더 분격했으며 또 겸하여 애통한 ?밀소서와 함께 총리 호남의병대장이란 이름을 내리므로 12월 11일 인봉 공과 함께 저산재실에서 의기를 세워 광훈, 광수, 광채 및 윤영기, 박기덕 제공이 참여했으며 양한규 공과 약속하고 그뭄날 밤 남원의 적을 치자했으나 양 공이 전사하므로 공도 형세가 불리하므로 물러났다.
다음해 5월에는 ?주왜적, 8월에는 동복의 적을 치고 호남의병장 김동신 공과 응봉에서 만나 서로 맹서짓는 등에 양 공의 맹렬한 유격전을 적이 가장 두려워하여 놈들은 마침내 공의 녹천본가를 불지르기까지했었다.
공의 병군이 구례 연곡사에 진친 것은 8월 11일이었고 태극기 위에 不遠復(불원복) 석자를 써서 원수의 기를 세우고서 동으로는 화개동, 북으로는 문수암을 끼고 참모본부를 삼더니 9월 8일 적이 문수암을 불지르고 화개로 갔다 하므로 군대를 두 길로 보내어 적의 머리와 꼬리를 치게 하고 공과 인봉 공은 본진을 지키시다가 적의 기습으로 급하게 되자 공은 인봉 공과 모든 부하들을 향해 피하라 했으나 모두 의로써 같이 일어났으니 같이 죽으리라 하고 안 피했으며 공은 마침내 포연속에서 적을 꾸짖되 살아서 너희 섬나라를 못 멸했으나 죽어 귀신이 되어 모조리 죽이리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