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541-1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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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의 집은 또한 한말 의병장 기삼연이 을미의병을 일으켰다가 조정의 해산조치에 저항하다 체포된 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은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집의 뒤쪽에 송진우 기념관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 가옥은 고하 송진우(1890~1945)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했던 가옥으로 한말 호남의병의 영수인 성재 기삼연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송진우를 교육시키며 후일의 3차 의병활동을 구상하였던 가옥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겸 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사랑채 겸 문간채는 구조상 흔하지 않은 건물로 주목받고 있다.
고하 송진우는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 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 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선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겸 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사랑채 겸 문간채는 구조상 흔하지 않은 건물로 주목받고 있다.
고하 송진우는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 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 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하 송진우 선생 생가
고하 송진우 선생(1890~1945)은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중앙학교장시에 3.1운동을 추진시켜 범민족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동아일보사장으로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 민주, 민생, 민문의 사민주의사상(四民主義思想)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많은 고난을 겪었다. 해방 후 일제의 정권인수 제의를 거절하고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여 민주한국을 건설코자 진력하다가 불의의 흉탄을 맞아 운명하였다.
고하 송진우 선생(1890~1945)은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중앙학교장시에 3.1운동을 추진시켜 범민족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동아일보사장으로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 민주, 민생, 민문의 사민주의사상(四民主義思想)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많은 고난을 겪었다. 해방 후 일제의 정권인수 제의를 거절하고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여 민주한국을 건설코자 진력하다가 불의의 흉탄을 맞아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