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삼항일농민운동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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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산27-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궁삼항일농민운동은 조선말 오리들의 횡포로부터 일제시대 동척의 토지 수탈과 신한공사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이나 피눈물로 고초를 이겨내고 항거 투쟁한 사실과 애족하는 심정으로 이를 해결하고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숨어있는 귀중한 역사가 있다는 것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될것이기에 기록하고저 다. 나정문은 일헌병과 동척사원 700여 이 출동하여 경작료를 강제적으로 수납 촉하자 이에 불응하므로 혹독한 고문 에 치사케 하고 문안중은 삼면 대표로써 극렬한 투쟁을 하였다.주태순 김원석 윤효병 박서오 등은 토지회수동맹위원과 경작료불납동맹지휘자들이 되여 결사적으로 대항했으며 박서오는 양심
적인 일인 森島와 福田 양인을 호출하여 농민토지가 확실하다는 주장을 하게하고 본인은 결국 옥고를 치렀다. 이항발 염경선 등은 서울의 이광 광주에서 강석봉 김재명을 초청 궁삼면농민회를 조직하고 토지 회수 운동을 전개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김기홍 김형율 최태홍은 동척회사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나기용은 구금자들을 석방 운동하다가 6개월 옥고를 당하고 서화은은 소유권 확인과 토지 인도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길로는 군수의 허위 보고 취하 운동 전개 차 서울 가다 체포되여 투옥되였다. 박익서 유영훈 나성채 등을 일본 파견대표로 선정했으나 이를 변경하여 나재기 이화춘 최태중 박승효로 하고 이들은 현지에서 맹렬한 운동을 하였고 이용구는 온갖 위험을 무름쓰고 연락과 소작료 불납 운동에 선봉이 되여 결사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나치구는 경리를 담당하고 갖은 노고를 다하였다. 1919년(대정8년) 최기림의 주최로 토지회수를 전개하고 그 후 나재기 박승효 최기림은 서울고법에서 승소 판결문을 가지고 도라오다가 나주서 고등계 주임 일인 丸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금상호 의원은 국회 조사단장이 되여 궁삼면 실정을 조사한 후 1950년 2월 13일 국회 제29차 회의에서 보고되였다. 기 내용인즉 농토는 무조건 무상분배해줘야하며 그에 대한 손해배상도 해주게 됨으로써 농민의 뜻데로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로부터 4개월 후 6.25가 발생하는 바람에 실행을 못봤다. 6.25가 평정된 뒤 나주 갑구 출신 2대 김종순 3대 최영철 양의원의 노력으로 귀속농지로써 분배되여 15년간 부상환으로 납부하게 됨으로 해결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토록 궁삼면항일농민운동이 처절하고
잔인무도한 사건으로 급기야는 애국운동으로까지 확산되였으니 선현들의 숭고한 얼을 위안함과 동시에 유일한 문화유산으로 삼고 민족자존의 지표가 되고저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993년 계유 2월
궁삼항일농민운동공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