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궁삼면 항일농민운동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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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장산리 산27-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羅州宮三面抗日農民運動紀念碑(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

궁삼면은 19세기말 경선군의 궁터가 있었던 나주군 지죽면(현 세지면), 욱국면(현 왕곡면), 상곡면(현 가야동)을 이르는 말이다.
이 땅에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가뭄으로 세금을 내지 못하자 이를 대난해 주겠다고 속여 토지를 수탈해 감으로써 농민들의 항거가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지만, 땅은 결국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어가고 말았다. 농민들은 이 땅을 찾기위해 법정싸움을 계속하면서도 항일농민운동으로 발전시켜 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이 된 이후에도 땅을 돌려받지 못하고 다시 돈을 주고 사야했던 고통이 있는 뒤에야 이 농민운동은 마무리되었다.
羅州宮三面抗日農民運動紀念碑(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
주익에게 교섭했으나 거절당하자 토지매수반을 파견하여 관헌의 위력과 뇌물로써 궁삼면 토지의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시가 200만 원 상당을 단돈 8만 원에 매수하였다. 그리고 3개 면민에게 이 토지가 동척 소유임이 확실하다는 승인 날인을 강요했으나 한 사람도 이에 응하지 않자 당시 3면의 동장이던 이상협 장홍술 염자옥 김운서 등을 체포하여 혹독한 태형 끝에 도장을 빼앗아 3면 토지를 동양척식회사의 소유로 했으니 이때부터 3개 면민과 동척간에 토지 계쟁이 시작되었다. 면민대표들은 한일합병으로 조야가 소연한 1910년 10월 중순 상경하여 동척과 담판했으나 무위에 그치자 변호사에 위임하여 토지매수 무효 및 토지반환 청구 소송을 냈다. 그러나 동척은 1912년 봄 일본 이민들에게 경작권을 양여하기 위해 동척 회사원과 일본인 헌병 및 보조원들을 데리고 왕곡면 금산리에 출동하여 논두렁에 닥치는 대로 동척의 표말을 박았다. 이때 이회춘의 노모가 분연히 반항하고 나서가 헌병 상병 中島가 새끼줄로 노파의 목을 묶고 군도와 몽둥이로 난타하여 즉사케 했다. 이에 이회춘은 경성고등법원에 호소하려고 동리민들과 노모의 사체를 메고 서울 길에 나섰다가 양평에 이르러 헌병에게 모진 매를 맞고 쫓겨왔는데 일본인 사법서사 本压派衝의 '동척의 죄악사'라는 수기에 이 사실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해 면민대표 이화춘 나재기 박승효 최태중 이제호 등은 동척이 불법 점거한 민유토지의 반환청구 소송을 광주재판소에 제기하여 익년 5월 24일 승소 판결을 받았으며 이어 경성고법에서도 승소하였다. 그러나 판결 서류를 휴대하고 귀환 도중 나주경찰서 고등계 주임 丸山鶴吉이 인솔한 경찰대에 혹심한 구타를 당한 끝에 판결문을 빼앗기고 말았다. 거듭된 패소에도 동척은 도청의 토지대장을 근거로 계속 소유권을 주장하자 면민들은 다시 등기 말소 소유인도 소송을 광주재판소에 제기하였다. 동척은 재판이 불리함을 알고 1914년 11월 사원과 헌병 700여 명을 동원 3개 면을 점령하고 나재기 외 면민대표 10여 명을 구속했으며 농민 150여 명을 영산포 헌병분견소와 광주감옥에 가두었다. 또 2만여 면민에게는 3개월 동안 문밖출입을 금지시키고 가혹한 고문과 협박으로 소유권 포기 증서에 날인케 했으며 소송도 취하케 하고 말았다. 1920년 나주기 최태중 이제호 나명구 등 면민대표 120여 명은 소작료 불납 운동을 전개했으며 왕곡면 덕산리 구기촌 황필선가에서 토지회수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남자는 몽둥이 여자는 치마에 돌멩이 를 담아 나주경찰서를 습격했다. 또 3개면 경찰관주재소 및 각 소작료 수납장의 기물과 사무용품을 모조리 파기하였다. 이 사건으로 면민대표 등 200여 명이 체포 구금되었는데 이를 탄원키 위해 이화춘 나재기 박승효 최태중 등을 일본 의회에 보내려 했으나 실패하자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에게 토지 회수 투쟁 경과와 혈서 혈판을 제시하고 민사소송을 의뢰했다.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1926년 3월 5일 내한하여 영산포에서 현지조사에 착수했다. 동척은 경찰과 총독부와 합세하여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속이려했으나 면민대표들의 끈질긴 제보와 폭로로 그들의 비리가 백일하에 탄로되고 말았다. 그러자 경찰은 면민대표는 물론 일반민까지 구금하고 고문을 가했으며 이 때문에 나재기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광복 후 1945년 10월 나재기를 위원장으로 부위원장에 나승잠 총무 김태민 지도책 나순조 재무 양복동 지도위원
장석태 나병기 나천균등이 궁삼면농민회를 조직하여 적산으로 처리된 궁삼면 토지의 무상분배를 미군정에 요청하는 한편 궁삼면 사건의 진상을 한글 영문판으로 만들어 신문사 등 각계층에 배포하였다. 궁삼면항일농민투쟁은 농지개혁으로 그 막을 내렸으나 반세기에 걸친 불굴의 항일정신은 우리 민족사와 함께 영원불멸의 금자탑으로 남을 것이다.
기념비 건립 경위

나주 궁삼면 항일농민운동의 재조명을 위해 서기 1983년 2월 나순조는 재경나주인향우회를 비롯 한일문화교류협회 호남문학회 등 각계인사와 본사업 추진을 논의해오다가 1990년 2월 17일 나주군민회관에서 각면 대표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사업회를 조직하자는데 만장일치 의견이 모아져 추진위원장에 김영환 상임고문에 나순조 총무에 김상현 재무에 안기봉 감사에 김정식 정제갑 등을 선인하고 동년 5월 김일예식장에서 총회를 열고 전 회원의 자진성금과 전라남도 및 나주군의 보조금으로 기념비를 건립키로하였다. 그 후 순조로운 진척으로 건립부지가 마련되어 나주군 왕곡면 장산리 현장에서 1991년 9월 13일 기공식을 갖고 동년 11월 5일 완공 제막식을 거행함으로써 나주 농민의 토지 회수 투쟁의 전말을 국민 앞에 굴절 없이 밝혀 후일을 경계하는 거울로 삼는 동시에 흐려진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되살리고자 이 비를 건립한다.
나주궁삼면항일농민운동기념비 사업헌성 방명비
헌성기

일제 치하에 토지강탈과 오리들의 황포는 잔인무도했으며 유례가 없는 학정이였다. 하다 못하고 보다 못한 남녀노소 궁삼면민은 이에 맞서 피눈물로 대항했던 불굴의 항일투쟁정신은 바로 이 고장의 항일농민운동이었으며 애국운동이기도 했다. 그동안 격동의 과정과 자체의 역사를 찬란하게 한 업적을 기념하고 현양하는데 물심양면으로 협조하여주신 선배 동지들의 향토애와 정열에 감사하고 이 정성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저 이에 방명하노라.

서기 1992년 1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