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회 충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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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 산57-18
탐방로그
애국지사 권영회 선생의 충절비를 찾아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志士 權寧會 忠節碑(애국지사 권영회 충절비)
愛國志士 權寧會 忠節碑(애국지사 권영회 충절비)
愛國志士 權寧會 忠節碑(애국지사 권영회 충절비)
항일 의병장 안동 권공 영회의 호는 월산이요 자는 택이며 보명은 찬식이니 서기 1885년 9월 19일 당시의 남평현이었던 나주군 봉황면 운곡리 구례동 월정에서 조선초의 문신 권근의 18대손으로 출생하였다. 공은 천품이 담대하고 기량이 컸을뿐 아니라 경학과 역서 병법을 익혀 깊은 경지에 이르렀더니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그에 이은 정미7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이 위태로움을 보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 1907년 6월 장성의 기삼연과 더불어 항일의 의려를 일으켰다. 불행히도 기공이 왜병에게 잡혀 순국하게 되자 다시 덕산에서 의병을 모아 부대장이 되어 싸움을 계속하다가 1908년 7월에는 심남일과 합세 그 참모가 되어 영광, 강진, 장흥, 화순, 남평 등 각군에서 많은 격전을 치루는 가운데 특히 영암의 사촌
항일 의병장 안동 권공 영회의 호는 월산이요 자는 택이며 보명은 찬식이니 서기 1885년 9월 19일 당시의 남평현이었던 나주군 봉황면 운곡리 구례동 월정에서 조선초의 문신 권근의 18대손으로 출생하였다. 공은 천품이 담대하고 기량이 컸을뿐 아니라 경학과 역서 병법을 익혀 깊은 경지에 이르렀더니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그에 이은 정미7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이 위태로움을 보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 1907년 6월 장성의 기삼연과 더불어 항일의 의려를 일으켰다. 불행히도 기공이 왜병에게 잡혀 순국하게 되자 다시 덕산에서 의병을 모아 부대장이 되어 싸움을 계속하다가 1908년 7월에는 심남일과 합세 그 참모가 되어 영광, 강진, 장흥, 화순, 남평 등 각군에서 많은 격전을 치루는 가운데 특히 영암의 사촌
에서는 왜장 금평산 등 수십 명의 적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동년 10월에는 조경환과 함평 광주 등지에서 동년 12월에는 박민홍 부대와 합류 나주 남평 무안 등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멀리 안규홍 전해산 등과 연합전선을 펴기도 하였다. 1919년 6월에 이르러 일군의 대토벌작전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데다가 순종의 해산 명령이 있게 되자 공은 울분을 씹으며 재기를 다짐하고 잠시 구세군에 의지하고 있다가 동년 9월 20일 장흥 내양리에서 왜병에게 잡히는 바가 되었다. 광주 재판소의 대구 공소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나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의병이지 폭도나 살인강도가 아니라고 항변함은 물론 갖은 협박 공갈 회유를 물리치고 왜병이 주는 음식물에 혀를 끊어 피를 토해 거절하니 적도 이를 감탄하고 두려워하였으며 끝까지 옥중 투쟁을 하다가 1910년 7월 1일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로 형장에서 순절하기에 이르렀다. 공께서 가신 지 70년 만에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추서하였으나 어찌 그것이 거룩한 죽음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되었다 하겠는가. 오늘에 와서 친족들과 향리를 비롯한 원근의 유지들이 뜻을 같이하고 이어서 국가보훈처의 지원까지 받아 공의 행적과 민족혼을 기리는 충절비를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옛터에 세우게 됨은 오로지 고인의 넋을 위로하면서 후진들을 일깨우고자 함에 있을지니 그 뜻이 깊고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서기 1989년 기사 10월 일 전주인 이명한 근찬 장흥인 고광렬 근서
에서는 왜장 금평산 등 수십 명의 적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동년 10월에는 조경환과 함평 광주 등지에서 동년 12월에는 박민홍 부대와 합류 나주 남평 무안 등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멀리 안규홍 전해산 등과 연합전선을 펴기도 하였다. 1919년 6월에 이르러 일군의 대토벌작전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데다가 순종의 해산 명령이 있게 되자 공은 울분을 씹으며 재기를 다짐하고 잠시 구세군에 의지하고 있다가 동년 9월 20일 장흥 내양리에서 왜병에게 잡히는 바가 되었다. 광주 재판소의 대구 공소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나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의병이지 폭도나 살인강도가 아니라고 항변함은 물론 갖은 협박 공갈 회유를 물리치고 왜병이 주는 음식물에 혀를 끊어 피를 토해 거절하니 적도 이를 감탄하고 두려워하였으며 끝까지 옥중 투쟁을 하다가 1910년 7월 1일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로 형장에서 순절하기에 이르렀다. 공께서 가신 지 70년 만에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추서하였으나 어찌 그것이 거룩한 죽음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되었다 하겠는가. 오늘에 와서 친족들과 향리를 비롯한 원근의 유지들이 뜻을 같이하고 이어서 국가보훈처의 지원까지 받아 공의 행적과 민족혼을 기리는 충절비를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옛터에 세우게 됨은 오로지 고인의 넋을 위로하면서 후진들을 일깨우고자 함에 있을지니 그 뜻이 깊고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서기 1989년 기사 10월 일 전주인 이명한 근찬 장흥인 고광렬 근서
충절을 우러러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아침 햇빛보다 더 붉은 우국의 단심 왜구의 침략 참지 못하고 의려의 횃불 높이 들었네
남도의 땅 가는 곳마다 총칼을 들고 적을 무찔러 분홍의 피로 물들인 강산 끝내는 형장의 이슬 민족의 넋으로 되살아났거니
나라 위해 바친 꽃다운 청춘 갖은 형벌 이겨내어 장부의 의기를 드높엿으니 아아! 고귀하고 아름다운 얼이여 겨레와 더불어 이 땅에 영원하리
향리민 일동 드림 권희열 근고
충절을 우러러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아침 햇빛보다 더 붉은 우국의 단심 왜구의 침략 참지 못하고 의려의 횃불 높이 들었네
남도의 땅 가는 곳마다 총칼을 들고 적을 무찔러 분홍의 피로 물들인 강산 끝내는 형장의 이슬 민족의 넋으로 되살아났거니
나라 위해 바친 꽃다운 청춘 갖은 형벌 이겨내어 장부의 의기를 드높엿으니 아아! 고귀하고 아름다운 얼이여 겨레와 더불어 이 땅에 영원하리
향리민 일동 드림 권희열 근고
景慕壇(경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