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동곡리 43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열부 나주임씨 실적비, 4의사 충의비, 최택현 선생 순국 유덕비
열부 나주임씨 실적비
열부 나주임씨 실적비
烈婦羅州林氏實蹟碑
嗚呼?正熄而天下夷矣素質喪而虚文日滋雖 以三綱五倫之窮宇宙互古今不可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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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呼?正熄而天下夷矣素質喪而虚文日滋雖 以三綱五倫之窮宇宙互古今不可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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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임씨 실적비
최윤용의 처 나주임씨씨는 사인 임병언의 딸이다. 정미년(1907) 가을에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윤용의 부친 택현도 종형 광현, 종제 병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아들 윤용도 종군하였다. 1909년 가을 일본군과 전투에서 패해 이들이 모두 함께 전사하였으니 1909년 8월 10일이다. 부인은 통곡하고 기절하였지만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부인에게는 늙은 시어머니와 젖먹이 어린 딸이 있어 바로 뜻을 이룰 수 없었는데, 얼마 후 돌을 안고 우물에 투신하였다. 신하와 임금, 자식과 아비, 처와 지아비에 있어서 그 의리는 한 가지라, 택현이 죽은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니 충이요, 윤용이 죽은 것은 아비를 위한 것이니 효이며, 유인이 죽은 것은 지아비를 위한 것이니 열이로다. 대저 충과 효와 열 삼강은 천지 인륜에 막중하고 막대한 것인데 한 집안에 함께 꽃을 피웠도다.
최윤용의 처 나주임씨씨는 사인 임병언의 딸이다. 정미년(1907) 가을에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윤용의 부친 택현도 종형 광현, 종제 병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아들 윤용도 종군하였다. 1909년 가을 일본군과 전투에서 패해 이들이 모두 함께 전사하였으니 1909년 8월 10일이다. 부인은 통곡하고 기절하였지만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부인에게는 늙은 시어머니와 젖먹이 어린 딸이 있어 바로 뜻을 이룰 수 없었는데, 얼마 후 돌을 안고 우물에 투신하였다. 신하와 임금, 자식과 아비, 처와 지아비에 있어서 그 의리는 한 가지라, 택현이 죽은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니 충이요, 윤용이 죽은 것은 아비를 위한 것이니 효이며, 유인이 죽은 것은 지아비를 위한 것이니 열이로다. 대저 충과 효와 열 삼강은 천지 인륜에 막중하고 막대한 것인데 한 집안에 함께 꽃을 피웠도다.
동촌마을을 찾았다.
3기의 비석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