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인 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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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남대동 2-2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드디어 그 해 12월에 나주에서 독자적으로 창의하여 호남 일대 민족봉기의 선구자로서의 기치를 높이 드날렸다.
열혈청년 의병장 초공의 휘하에는 삽시간에 5백여 군병이 운집하였고 총기도 또한 4백여점을 확보하여 기세를 떨치었다. 나주는 물론 함평 영암 영광 담양 장성 광주 등지를 두루 전전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탄약의 부족을 통감한 공은 스스로의 재력을 기울여 기술을 도입 나주 가산(삼도면)에 탄약제조소를 차리었다. 아뿔사 이때에 정보가 누설되어 마침내 1908년 6월 왜경에게 체포되어 대구 형장에서 천추의 한을 품고 순국하였다. 공의 조직적이고도 치밀한 의병활동에 담겨진 의열정신을 간추려보면
첫째 공은 무엇보다도 먼저 총기를 수집하고 탄약을 자급하여 군수물량이 풍부해야 군졸의 사기를 드높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둘째 실전에 임하여 임기응변 황토벌에서는 황의군 솔밭에서는 청의군을 투입한 것은 위장 유격전술로서 전략가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요
셋째 공이 정사를 변경할 목적으로 한 내란죄로 처형된 것은 그의 의병정신이 비단 항일에 그친 것이 아니라 갑오경장 정신에서 이어온 국정쇄신에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조공의 집약된 의병정신으로서 길이 오늘의 우리와 더불어 살아있으므로 마침내 1977년 12월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이 추서되었으니 이에 공이 끼친 구국정신을 선양하는 뜻을 다지기 위하여 우리 모두의 정성을 모아 여기에 이 비를 세우노라.
의병장 단암 조정인 순절비
의병장 단암조정인 순절비
조정인 선생은 1907년 일본의 일방적인 정미조약 체결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이에 격분하여 호남의병장 김태원(김준), 기삼연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본 헌병대와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1908년 나주에서 의병활동에 필요한 탄약을 제조하던중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옥중에서도 국가독립의 타당성을 외치시다 1909년 1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시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의병장 단암조정인 순절비
의병장 단암 조정인은 1872년 1월 14일 나주읍 서부면 명당(장정동)에서 조삼원의 3남으로 태어났고 1909년 1월 18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절하니 때에 공의 나이 37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 또한 장사여서 아우 정용과 더불어 명성이 우너근에 떨치었다. 대지주로서의 부력을 배경으로 하여 군량미 조달과 비축을 목적으로 짐짓 미곡상을 위장 경영하기도 하였다.
때에 국운은 날로 기울고 일.청 일.로 양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의 오만불손 방자한 행동 또한 날로 자심하여 드디어 1905년에는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외교 군사등 국권의 태반을 강탈하니 나라 빼앗긴 통분에 온 나라가 들끓었다.
1907년 9월 장성 기삼연은 호남창의맹소를 차려 총대장으로 추대되자 공은 그들과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