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욱 건국유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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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 남창리 246-1
탐방로그
나주시 공산면 남창리 246-1 애국지사 노병욱(盧炳旭) 건국유공비를 찾았다. 건국유공비 옆에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된 후의 구 묘비도 함께 찾아볼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를 하니 공산면 유지로써 또 청년단 부단장으로써 꼭 환영식에 참석하라는 인편을 보냈습니다. 환영식에 가니 면유지들이 수십명이 와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 장승백이 쪽에서 총소리가 마치 콩 튀는 소리를 내면서 진주를 하는데 면사무소까지 총을 쏘면서 진주하니 유지들이 놀래서 벌벌 떨면서 얼굴색이 잿빛이 되여 바닥에 넘어지고 구석에 처박히는데 어제까지 공산당의 분소로 쓰던 것이라 공산당이 있는 줄 알고 국군은 총을 쏴댔다는 것입니다. 아버님이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국군을 환영한다고 모였다가 여기와서 죽다니 하다보니 국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아버님이 태극기를 만들어 문밖으로 내미니 총소리가 멈추자 만든 국기를 들고 나가서 환영식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 왔다고 그날밤에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전합니다. 환영식한지 3일만에 국군은 철수하고 다시 공산당 세상이 되니 환영식때 태극기 만든 아버지는 국군과 내통을 하고 있으니 국기를 만들 수 있었다고 반동이라고 철수한지 9일째 되는 날에 저희집에 친입하여 음력 9월 16일 밤중에 아버님은 그날밤에 아버님을 하시고 곤히 주무시다가 두손을 뒤로 꽁꽁 묶어가지고 창과 무쇠로 만든 대칼로 등을 마구 두들겨 패니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느냐며 내 죄목을 대라고 당당하게 수없이 말씀하시니 국군과 내통한 반동이라고 하면서 공산당대는 매질하니 두둘겨 맞아 억울하게 가신 내 부모 형제는 내 가슴에서 죽어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놈들은 속옷만 입고 자던 동생을 깨워서 새끼줄로 올가미를 내서 묶으려 하니 나는 16살이요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이러냐면서 몸부림치는 동생을 끈에 오빠와 함께 두 손 뒤로 묶어 놓고 무조건 대칼로 매질을 하였습니다. 집밖에 끌려가보니 골목에 어머님이 반듯이 누워 계셔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내 뒤에 소가 끌려가다가 말못한 짐승도 안주인이 누워계시니 가던 발을 멈추고 놈들이 채찍을 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어머님 곁에서 코로 냄새를 맡듯이 다리부터 가슴으로 얼굴로 오니 어머니는 소의 콧김으로 인해서 가슴에 막힌 숨을 꿀-울하면서 숨을 토해내쉬더군요.

짐승도 숨을 내쉬는 안주인을 보고서야 놈들을 따라가더군요. 제 뒤에 소가 있기에 놈들의 눈을 피해 어머님을 모시고 분소로 가려는 마음으로 어머님 계신데 가보니 놈들에게 끌려가셔서 나도 가족간 곳으로 가려하니 마을사람들이 못가게 붙잡아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남았습니다. 마을 어귀야산에서 아버님을 매질도 부족해서 수박의 봉뜨듯이 머리를 떠놓고 어머님은 목에다 오빠는 가슴을 동생은 이마를 칼로(온몸을 대칼로 빈틈없이 찔러대니 그 얼마나 아파서 절귀의 통곡소리에 건너마을 사람들까지 깊은 잠을 깨어 떨며 울며 날을 세워 답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마의 만행으로 온 가족을 학살하였습니다. 죄없는 내 아버님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형제와 죄없이 억울하게 당하신 영혼이 천추에 한이 되여 저승길도 못 가시고 중천에 떠다니면서 슬피울며 마을이고 논밭에서 친한 친구들의 눈에 띄였다고 합니다. 우리 부모 형제 애달품을 다 쓰려면 강물로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부족합니다. 딸로서 한 놈이라도 부엌칼로라도 찔렸어야 하는데 어리석고 못난
겁쟁이 자신을 생각하면 피가 꺼꾸로 솟구칩니다. 아버님을 그렇게도 대칼로 등을 두둘더니 아버님으 목에서 피가 터져 핏자국이 마을에서부터 학살당한 야산까지 흘리셔서 흘린 핏자국을 따라 학살현장을 찾았습니다. 슬기롭고 지혜와 총명을 겸해 나라의 큰 기둥이 되시고 국가에 봉사하실 애국지사를 학살한 공산당이 치가 떨립니다. 나의 부모님 나의 오빠 나의 동생 사랑하는 내 가족들 이제 평안히 눈 감으소서. 편히 쉬소서. 천국에서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하소서. 후손들의 빛이 되소서. 가족의 당시 연세 아버님 노병욱 42세 8월 11일생 당시 공산면 청년부단장 어머니 이망단 40세 6월 18일생 오빠 노은석 20세 10월 15일생 당시 공산지소의 경조대 입시 준비 중 동생 노석균 16세 11월 25일생 당시 상업학교 2학년 딸 노장순 18세 9월 5일생 현제 74세 억울하게 한 많은 생을 마쳤습니다. 지나는 행인들이여 가시는 걸음을 잠깐 멈추시고 쉬어 가세요. 억울하게 가신 한많은 영혼들의 억울함을 위로해 주세요. 아~ 억울하고 애달퍼라. 사랑하는 나의 부모 형제님이여.
후손 (자)노장순 / 김태수 (손)김극용 / 정정자 김가빈 김수빈 (손)김극명 유선희 김지희 김주리 김정한 (손)김극선 김순아 김순희 (자)노영기 / 이덕례 (손)노종대 노종심 노종일 노종순 노종균 노종금 노순희 노경하 노태형
나주시 공산면 남창리 246-1 애국지사 노병욱(盧炳旭) 건국유공비를 찾았다.
愛國志士 盧炳旭建國遺功碑(애국지사 노병욱 건국유공비)
노공 휘 병욱은 광산인이며 선조 휘 蒿(호,고) 조선 국초 의정부 우의정 시호는 경평공 20대손 1908.8.11생 1950 음 9.16졸 부친은 봉모 모친 김씨(의성) 사이에 공산면 중포리 척포마을에서 태어나(처 이망단) 슬하에 3남 1여를 두었다. 공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공산초등학교 제5회를 졸업하고 나라 잃은 설움을 통탄하여 항
일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공은 목포와 영산포 등지로 농산물을 운송하는 선박을 소유하였으며 우리나라 독립운동 투사들이 비밀리에 흑산도 무안 반도 유달산 등지로 수십차례 왕래하던 중에 일본 군인들이 중국의 장개석 군인들에게 투항도 하고 귀속하는 군인들이 날로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은 불원간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위 사실을 공산면 사무소에서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 이 내용을 알리다가 일경에 발각되여 허위 사실 유포하고 유언비어를 했다는 죄명으로 1944년 3우러부터 1945.8.14까지 옥고를 치루었다. 광복 후 건국 초기에는 좌우이념과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대립의 혼란 시기에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민족청년단 부단장으로 활동하고 950년 9월 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 장병과 경찰들이 수복한다는 정보를 듣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환영 준비를 하다가 자유민주주의 수호신으로 희생하였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200
5년 8월 15일 제 60주년 광복절에는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포장증이 뒤늦게 추서되었다. 공은 억울하고 애석하게 이 땅에서 가셨지만 이 거룩한 항일 독립정신과 자유 민주주의의 애국애족 정신을 후손들에게 영원히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면민의 뜻을 모아 애국지사 건국유공비를 세우는 바이다. 서기 2007. 족질 노영균 근찬
통한의 비
아- 불러보기도- 애처러워라 내 사랑하는 부모형제-여
애국지사 노병욱 님의 사랑하는 딸인 저 노장순은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공산당에게 학살당하고 평생을 가슴에 품어 온 한을 여기 적어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우리 아버님 노병욱님은 집이 가난하여 14살에 공산초등학교 입학하였습니다. 자립심이 강하셨던 님은 손수 학비를 마련하려고 동료들의 이발을 해 주고 학비를 벌면서 공부를 하여 공산초등을 5회로 졸업하셨습니다. 신체가 건강하여 공산학교 뿐만 아니라 나주시에서도 넓이뛰기 달리기에 1등하는 만능선수이셨습니다.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셨으나 밤에는 한문공부를 열심히 하고 낮에는 닥치는대로 일하여 모은 돈으로 배를 마련 영산포시장과 목포시장을 농산물과 생필품을 운반하며 받은 운임을 저축하며 근검절약하여 논과 산을 사고 개간하여 밭을 이루고 가정에 출실하며 열심히 저축하니 나이 사십안에 인근에서 부러워하는 부농이 되었습니다. 또한 보리고개때면 할아버지와 함께 가난한 이웃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어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 되고보니 조국 광복을 위해 일하던 독립군에
에게도 손발이 되어 유달산 봉홧불 올릴때와 여러 차례 독립군의 이동 등 활동에 큰 도움을 주셨고 애국심이 강한 아버님은 모아둔 돈으로 활동자금도 대주며 긴밀한 유대를 가져오셨습니다. 희망이 없고 암울했던 그 시기에 지역 주민들에게 흑산도 해상에서 일본군의 시체가 떠내려 오는 걸 목격하시고 일본이 곧 망하니 희망을 갖자고 말씀하신 내용이 고발당하여 나주 일경에게 구속되어 온갖 고문으로 독립군의 행방을 추궁하나 피골이 상진되어 혈변을 보면서도 절개를 지키시고 굴하지 않아 미결수 8개월을 고문받고 조사 당하다 공산면민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유언비어 날조라는 죄명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 1년 6개월형을 받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출소하셨습니다. 고 병욱은 미결수로 고문에 시달리며 고통속에서 뼈와 가죽만 남아 혈변을 보면서 고통받고 있는 아들을 면회다녀오신 후 우리 재산을 전부 내놓고 아들 구명운동을 시작했으나 사상범이라 어찌 할 수 없다 하니 그 길로 가슴에 피병으로 누우시고 아버님이 출수 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병간호를 하셨지만 2년만에 돌아가시니 출상 후 삼년을 조석 상식하시면서 외출때면 할아버지 산소에 들려 큰절을 올리시고 오실때도 큰절을 올리시는 효심이 지극하신 아버님이셨습니다. 새 정부가 수립되니 공산면 청년단 부단장으로 선출되여 면민을 위해 일하시다 6.25가 되니 지역이 공산당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부유하다는 이유로 우익이란 당이 되어 숨죽이고 살고 있던 중 음력으로 9월 3일 정부측에서 비밀히 4일 공산면에 국군이 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