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672
- 탐방로그
-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672에 위치한 매천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매천사를 찾았다. 이곳에는 매천 선생 순절지인 대월헌도 함께 찾아볼 수 있었다. 매천유물관도 있었지만 이른 시간에 방문해서인지 문이 닫혀있어 내부를 탐방할 수 없었다. 매천 황선생 묘정비도 함께 있었는데, 매천 선생의 묘소는 매천사 옆 소나무 숲에 있다가 전남 광양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알고보니 이곳의 길 이름도 '매천로'였다. 이곳을 둘러보며 매천 황현 선생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을 추천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매천유물관이지만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문이 닫혀있었다.
梅泉 黃先生 廟庭碑(매천 황선생 묘정비)
선생의 휘는 현이요 자는 운경이며 매천은 그 호이다. 관은 장수요 세종조때 명상인 방촌 희가 그의 현조요 임란때 병사로 진주성을 수어하다가 장렬히 순절한 무민공 황진의 10세손이다. 남원에서 세거하다가 조부 식이 광양으로 이거하다. 백운산문 덕봉하 서석촌은 계산이 청봉하여 당유문장명세자출이라 고래의 전성리 있더니 선생은 거금 134년 철종 을유에 부 사인 시묵과 모부인 노씨의 장자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총명강결하여 출류발췌한 천부자질로서 11세때에 한시를 능히 지었고 15,6의 약년에 그 명성이 원근에 떨쳤으며 20세때 향리에서는 배울곳이 없음을 한탄하고 상경하여 당시 명사인 강추금 휘 이제, 제금창 강택영 등과 더불러 교유하여
서로 사우가 되므로 그 문명이 국중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종 계미에 보거과가 있었으나 때는 임오군란뒤 특별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입격되었으나 시관의 ????으로 ??해버림을 알고 이에 구례 백운산하 양전만수?으로 만거하여 거실을 하얀실이라하고 그 ??에 뜻을 끊고 ?거구지하며 오직 독서와 후진교육에 진심하더니 부명을 어길수 없어 고종 무자에 다시 응시하여 생원과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가의 내우외환이 일심하며 정계의 부태파 익심하여 국운이 일심하여 ?을 보고 그만 하향하여 교육과 저술에 주력하던터에 당시 정계의 친구들로부터 정계진출을 권고받었으나 고사절하였다. 광무9년 한일오조약이 늑결됨을 듣고 누일통곡부식하며 그 통한을 억누르며 근 보생하며 융희 결술에 드디어 한일합방이라는 흉보를 듣고 통분을 금할길이 없어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약자결하다.
成仁門(성인문)
梅泉祠(매천사)
매천 선생의 묘소는 저 곳 소나무 숲에 있다가 전남 광양으로 이전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672 월곡마을 매천 황현고택의 사당 매천사를 찾아가고 있다.
이곳은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買泉祠(매천사)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55-1-2 / 관리자 : 매천사 관리유족(대표자:황승연)
이 곳은 조선 말기 대표적 시인이자 역사가이며, 애국지사인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황현 선생의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으로 황희정승의 후손이며 시묵(時黙)의 아들로,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재주로 이름을 인근에 떨쳤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그는 고종 23년(1886) 생원시에 장원하는 등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로 불리었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잇따라 일어나자 국가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현재의 역사를 춘추편법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다. 그 결과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紀聞)』 등 이 전해지는데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나라를 강탈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여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그의 절의정신을 기렸다. 또한 매천이 만년에 활동했던 이 곳에 그의 후손과 지방유림들이 힘을 합해 1962년에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사당을 건립하여 매년 봄에 추모행사를 갖고 있다. 아울러 대월헌(待月軒)을 복원하고 그의 유품을 전시한 유물전시관을 세워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관리번호 : 55-1-2 / 관리자 : 매천사 관리유족(대표자:황승연)
이 곳은 조선 말기 대표적 시인이자 역사가이며, 애국지사인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황현 선생의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으로 황희정승의 후손이며 시묵(時黙)의 아들로,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재주로 이름을 인근에 떨쳤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그는 고종 23년(1886) 생원시에 장원하는 등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로 불리었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잇따라 일어나자 국가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현재의 역사를 춘추편법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다. 그 결과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紀聞)』 등 이 전해지는데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나라를 강탈하자, 국치(國恥)를 통분하여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그의 절의정신을 기렸다. 또한 매천이 만년에 활동했던 이 곳에 그의 후손과 지방유림들이 힘을 합해 1962년에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사당을 건립하여 매년 봄에 추모행사를 갖고 있다. 아울러 대월헌(待月軒)을 복원하고 그의 유품을 전시한 유물전시관을 세워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매천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7호 /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이곳은 조선 말기 대학자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1855~1910년)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립된 유적이다. 매천 선생은 광양 서석촌에서 태어나 고종 20년(1883) 실시된 과거시험에서 1등 하였으나 시골 태생이라 하여 2등으로 조정되었다. 그 뒤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고종25년(1888) 아버지의 명에 따라 생원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혼란한 시국과 관리들의 부패를 보고 구례로 내려와 시를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던 중 1910년 한일 합방의 비운을 통탄하며 4수의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고종 1년(1864)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매천야록을 썼고, 시문집 원고와 소장서적 등이 보존되어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7호 /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이곳은 조선 말기 대학자이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1855~1910년)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립된 유적이다. 매천 선생은 광양 서석촌에서 태어나 고종 20년(1883) 실시된 과거시험에서 1등 하였으나 시골 태생이라 하여 2등으로 조정되었다. 그 뒤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고종25년(1888) 아버지의 명에 따라 생원시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혼란한 시국과 관리들의 부패를 보고 구례로 내려와 시를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던 중 1910년 한일 합방의 비운을 통탄하며 4수의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고종 1년(1864)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매천야록을 썼고, 시문집 원고와 소장서적 등이 보존되어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彰義門(창의문)
이곳이 매천 선생이 돌아가신 대월헌이다.
待月軒(대월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