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산157-6
- 탐방로그
-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1265-3 비촌마을 입구 지원재(知源齋) 앞 의사 황병학 기념비를 찾았다. 백운산 전투는 1908년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의병장이 포수100명과 항일 투쟁을 벌였던 장소이다. 일제에 저항하여 의병활동을 펼쳤던 황병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비촌마을회관 앞의 비촌마을 유래기념비
서기 1500년경 창원황씨인이 날몰(飛村)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는 동안 애국지사 및 사회발전에 공헌한 많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1974년 수어댐이 생기면서 평촌마을 80세대 비촌마을 110세대가 수몰로 인하여 각기 이산되고 현재 60여세대만 남아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바 옛부터 산자수명한 천혜의 요람지인 이 고장의 정기를 받은 역사적인 뜻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뜻있는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이 기념비를 세우다.
2000년 2월 일
서기 1500년경 창원황씨인이 날몰(飛村)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는 동안 애국지사 및 사회발전에 공헌한 많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1974년 수어댐이 생기면서 평촌마을 80세대 비촌마을 110세대가 수몰로 인하여 각기 이산되고 현재 60여세대만 남아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바 옛부터 산자수명한 천혜의 요람지인 이 고장의 정기를 받은 역사적인 뜻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뜻있는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이 기념비를 세우다.
2000년 2월 일
비촌 마을회관을 지나서 조금 더 들어오자 도로변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산 157-6이다.
이곳의 GPS 상의 주소는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 산 157-6이다.
황병학 의병 백운산 전투비
황병학 의병 백운산 전투비
황병학 의병 백운산 전투비
1905년 일본제국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국은 백척간두의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분개한 황병학(자 영문 1876.1.11.~1931.4.23.)은 뜻을 같이 하는 종숙 황순모와 함께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라는 격문을 사방에 붙이자 산포수 등 200명의 장정들이 호응하여 의병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7월 26일 광양의 영봉 백운산에 호남 창의대장기를 꽂고 일본제국에 맞서 투쟁을 선포했다. 1908년 8월 5일 의병 150명은 광양 망덕포로 이주해 근대적인 어선으로 어장을 싹쓸이해서 광양어민을 괴롭히는 일본인을 기습 공격하여 선박을 침몰 시키고 주택을 불태우고 일본인을 사살하고 무기를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다. 1908년 9월 5일 망덕포전투로 일본인이 입은 피해를 보복할 목적으로 일본헌병경찰합동
토벌대가 편성되어 의병 100명과 옥곡원 후산에서 맞붙은 치열한 전투에서 황병학은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도 의병작전을 지휘 독려하여 다수왜적을 사살했으나 의병 13명도 희생되었다. 1908년 10월 황순모 한규순 이찬주는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 순국하였고 1909년 1월 23일 의병 50명은 의병을 토벌할 목적으로 병력이 증강된 광양헌병분견소를 야간에 기습하여 총 10정을 획득했다. 1909년 7월 19일 일본군은 백운산의병기지를 강력히 압박해 와서 더 이상 의병활동이 어려워 의병 100명이 의병기지를 백운산에서 묘도로 이동 중 일본군과 해상전투가 벌어져 백학선 등 많은 의병이 전사했고 황병학 등 50명은 여천군 삼일면으로 탈출했다. 일본군이 1909년 9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함에 따라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 의병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김응백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1910년 11월 대구공소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그 후 황병학은 여수 순천 고성 등지로 피신하다가 1919년 고흥인 기산도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 전달하다가 종로경찰서에 발각되어 1920년 7월 19일 광주지방법원은 황병학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황병학은 1919년 11월 임시정부 교통차장 김철의 도움으로 만주로 망명 용정 영고탑 흥개호 흑룡강 등지에서 독립군부대에 가담 전투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3년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도중 신의주에서 헌병대에 체포되어 1923년 10월 2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평양형무소에서 4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7년 출옥하여 옥고의 여독으로 1931년 4월 23일 55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는 황병학 건국훈장 독립장 황순모 애국장 김응백 독립장 백학선 애국장 한규순 애국장 이찬주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1977년 황병학의 묘소를 광양에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고 1986년 광양유림은 광양향교에 의사 황병학 기념비를 건립하고 1998년 4월 국가보훈처는 황병학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2017년 9월 광양향교는 시제를 의사 황병학선생 추모로 선정 전국한시백일장을 개최하고 장원시비를 건립했고 2019년 4월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주관으로 서울에서 의병장 황병학 백운산 항일운동 재조명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21년 4월 15일 의병장 황병학 기념사업회 대표 비송 황호부
2021년 4월 15일 의병장 황병학 기념사업회 대표 비송 황호부
〈헌시獻詩〉 거룩한 분노 / 정하선
- 항일의병장 황병학 선생 - (2019.4.25)
1908년도 혹은 지난날 항일의병들은 무덤도 비목도 없는 행방불명되기 일쑤였다. 그들은 생쇠골 야철로에 호미와 쟁기 녹여 총창 만들어 싸웠고 광양 백운산 원등재가 싸움터였고 싸운 뒤에는 갈까마귀 흩어지는 저승이었다. 광양 백운산 영봉에 "호남창의대장기" 곶아 일본제국에 맞서 투쟁을 선포한지 110년이 갔다.
왜, 우리는 죽었는가. 붉은 피 "쿨 쿨" 퍼부어 가며, 조선의 운명을 가르는 전쟁에는 질 수 없다는 각오였느니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죽었다. 그러할진대 국립묘지에 독립군을 사냥하던 개가 묻혀있다고?
할- 죽음에도 격이 있거늘 사람과 개를 한곳에 묻다니 이래서야, 어찌 역사를 말할 수 있겠나. 모여라- 호남창의대장기 깃발 아래 나오라- 정정당당한 역사 앞으로 해와 바람이 키운 조선의 억새풀 비바람으로 더욱 억세어진다.
- 항일의병장 황병학 선생 - (2019.4.25)
1908년도 혹은 지난날 항일의병들은 무덤도 비목도 없는 행방불명되기 일쑤였다. 그들은 생쇠골 야철로에 호미와 쟁기 녹여 총창 만들어 싸웠고 광양 백운산 원등재가 싸움터였고 싸운 뒤에는 갈까마귀 흩어지는 저승이었다. 광양 백운산 영봉에 "호남창의대장기" 곶아 일본제국에 맞서 투쟁을 선포한지 110년이 갔다.
왜, 우리는 죽었는가. 붉은 피 "쿨 쿨" 퍼부어 가며, 조선의 운명을 가르는 전쟁에는 질 수 없다는 각오였느니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죽었다. 그러할진대 국립묘지에 독립군을 사냥하던 개가 묻혀있다고?
할- 죽음에도 격이 있거늘 사람과 개를 한곳에 묻다니 이래서야, 어찌 역사를 말할 수 있겠나. 모여라- 호남창의대장기 깃발 아래 나오라- 정정당당한 역사 앞으로 해와 바람이 키운 조선의 억새풀 비바람으로 더욱 억세어진다.
황병학 의병의 노래 / Song of Hwang Byeong-Hak's Righteous Army (2019.4.25)
작사 : 황병학 격문 한정석, 작곡 : 문진오, 노래 : 문진오, 김가영
나라에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모진 바람 불어 조국이 위태로울 때 인간의 도리로 분연히 일어났도다. 피 흘리는 몸으로 적을 막아서며 민족위해 기꺼이 한 몸 바치리.
장검을 휘둘러 왜적과 맞서고 민족의 이름으로 깃발을 올렸으니 위대한 업적과 이름 역사에 새겨지도다. 세월이 흐른들 그를 잊을 수 있으랴.
나라에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작사 : 황병학 격문 한정석, 작곡 : 문진오, 노래 : 문진오, 김가영
나라에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모진 바람 불어 조국이 위태로울 때 인간의 도리로 분연히 일어났도다. 피 흘리는 몸으로 적을 막아서며 민족위해 기꺼이 한 몸 바치리.
장검을 휘둘러 왜적과 맞서고 민족의 이름으로 깃발을 올렸으니 위대한 업적과 이름 역사에 새겨지도다. 세월이 흐른들 그를 잊을 수 있으랴.
나라에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