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 묘(매천역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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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1132-
탐방로그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1134 매천역사공원에 위치한 매천 황현 선생 묘소를 찾았다. 매천 황현 선생의 묘소를 중심으로 뒤쪽에는 할아버지, 왼쪽에 아버지, 오른쪽에 큰아들의 묘가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시문을 쓰고 역사를 기록하다
청년 시절 상경하여 빼어난 시작(詩作) 활동을 하며 문사들과 교유하니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 삼대 시인으로 일컬어진 매천이 특설보거과에 응시하여 1등 했으나 시골 출신이라고 2등으로 낮추고 끝내 떨어뜨리는 잘못된 현실에 부딪혀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수동에 은둔했을 때도 아버지의 뜻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고 다시금 식년 생원시에 응시하여 1등 입격으로 성균관 생원이 되었지만 곧 그만두고 귀향했다. 세속의 미련을 버린 매천은 서재 구안실을 마련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문장가로서 꽃을 피웠다. 그가 쓴 시 2,500여 수 중 다수와 망국의 격동기를 엄정한 역사정신으로 기록한 『매천야록」 「오하기문」 「동비기략」 그리고 국정 개혁 방안을 담은 상소문 등을 구안실에서 집필했다.
만수동에서 구례읍 가까운 월곡으로 이사한 매천은 세상의 변화에 "참여를 꾀했다. 하지만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기울어가는 슬픔을 당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비분강개함으로 붓을 들어야 했고, 중국으로 망명하라는 권유도 따르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에 구례 유지들과 함께 신학문의 효시인 호양학교를 설립하여 새로운 인재 양식을 통해 나라를 구하려 했다.

선비의 학행일치, 순국으로 빛나다.
아 경술년. 한일병탄 소식을 접한 매천은 "글 아는 사람 구실 진정 어렵다" 하는 절명시 4수와 함께 자제들에게 당부하는 글로써 “나라가 망하는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지고 죽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아니한가” 하는 탄식을 남기고 장렬하게 음독 순절했다. 결연한 선비의 절의를 보이고 글과 삶을 일치시켜 죽음으로써 강력하게 항일운동을 한 매천을 추모하며, 당시의 지식인 158명이 애사(哀詞)를 쓰고 39명이 제문을 지어 슬픔을 표했다.
문(文) 사(史) 절(節) 세 봉우리를 한 몸에 갖춘 겨레의 위인 현실을 직시하고 풍자한 문장가요. 그 시대를 생생하고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가며, 나라의 운명을 따라 당당하게 목숨을 던진 지조 높은 선비 오로지 매천 황현, 그 홀로 이룩한 고결한 삶이 영롱하게 빛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의로운 선비로 추앙받는 매천 황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99년 8월의 문화 인물과 2005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2002년 광양시에서는 서석마을에 생가를 복원했고 순국 100주년을 맞아 추모 사업을 펼치며 숭고한 뜻을 기념하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글을 새기는 바다.
2010. 9. 10 광양시 매천 황현 선생 추모위원회
매천 선생을 중심으로 뒤쪽에는 할아버지, 왼쪽에 부친, 오른쪽에 큰아들의 묘가 있다.
愛國志士 長水黃公 進士 梅泉 先生 玹 之墓(애국지사 장수황공 진사 매천 선생 현 지묘)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1134 매천역사공원
매천황현(梅泉黃玹)
조선말기 대학자요 시인이자 우국지사였던 매천 황현선생(1855~1910)께서 태어나 성장한 생가로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2002년에 광양시에서 건립한 것이며, 황현선생(855~1910)의 본관은 長水(장수)이며 호는 梅泉(매천)으로 黄喜政丞(황희정승)의 15대 손이며, 시골 선비였던 아버지 時黙(시묵)과 豐川盧氏(풍천노씨) 사이에서 2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시문에 능하여 29세(고종25년 1883년)에 特設保擧科(특설보거과)에 급제하였고 34세(1888년)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과 조정의 부패를 안타깝게 여기고 급제와 동시에 낙향하여 구례에 살면서 호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진양성과 학문에 몰두하였다.
선생이 51세가 되던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 체제에 들게 되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여러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聞變三首(문변삼수)란 시를 지어 賣國(매국)행위를 통탄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에 항거하는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니 때는 1910년 음력 8월 7일 그의 나이 56세였다.
황현의 저서로는 고종 1년(1864년)부터 한일합방(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제로 서술한 매천야록, 매천집, 매천시, 동비기략 등이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單章(단장)이 추서) 되었고, 1998년에는 당해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 매천황현(梅泉黃玹)
매천황현 (1855년 12월 11일 ~ 1910년 9월 10일)
약력 1899 언사소를 올려 국정개혁을 주장
1905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애국시 발표
1910 한일합방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
愛國志士 黃玹 之墓(애국지사 황현 지묘). 아마도 예전 묘비석인 것 같다.
彰義亭(창의정)
彰義亭記(창의정기)
광양의 진산(鎭山)인 백운산이 세 간맥(幹脈) 을 이루어 그 중 서산맥이 아래로 내려오다가 책상을 펼친 듯한 모습으로 수기(秀氣)를 발하는 봉우리를 이루니 문성산(文星山)이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그 산 아래서 인재가 배출되었으니, 구한말의 의사(義士)인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은 산 남쪽 석현(石峴) 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희세의 자품(資稟)으로 독실하게 면학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시에 천부의 조예가 있었으니, 이십대 중반에 상경하여 당대의 명류인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등과 교유하여 한말삼재(韓末三才)의 칭을 얻었다. 삼십대 초반에 구례로 이주하여 학문과 육영에 전념하다가 등과(登科)를 원하는 부친의 뜻을 따라 생원시에 응시하여 일등으로 급제하였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귀향하여 저술에 몰두하였다.
국이 쇠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당하자 문변삼수(聞變三首)와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울분을 달랬고, 경술국치(庚戌國恥)에는 절명시사수(絶命詩四首)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니 향년 오십육 세였다. 김택영은 경술국치에 자결한 열다섯 의사(義士)중 문학으로 매천선생이 가장 저명하다고 평하였는데 이는 선생이 시문에 뛰어났음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역사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으로 여러 저술을 남겼으니 우리 역사상 문학과 사학과 절의를 전한 인물은 오직 선생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생은 사후 구례의 유산(乳山)에 안장되었다가 광복 전에 문성산 선영 아래로 이장되었는데, 광양시에서는 순국 일백주년을 맞아 매천 선생 순국백주년추모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이성웅(李聖雄) 시장과 의송 박태상(毅松 朴泰相)이 공동위원장 직을 맡아 묘역을 개수하고 상비(床碑)를 교체하여 면목을 일신하였다. 또 묘역 일대에 매천역사공원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워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정자를 세웠는데 절의를 빛나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창의정(彰義亭)이라 하였다. 향후 사당과 문사 절의관(文史節義館)의 건립도 추진하고 있으니 선생의 절의를 기리는 데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많은 참배객이 선생의 묘와 사랑에 배하고 문사절의관을 참관한 뒤, 잠시 이 정자에 앉아 절명시를 음송하고 선생의 절의를 추념하면서 위민애국(爲民愛國)하는 삶을 살겠노라 결의하게 될 것이니 이를 보는 선생의 유혼(幽魂)도 정녕 기뻐할 것이다.
2010년 경인 11월 상완(上浣)
문학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이영주(李永朱) 찬(撰)
柱聯 國譯(주련 국역)
不躡陳東眞抱恨(불섭진동진포한), 却從尹穀正堪憐(각종윤곡정감연).
나라가 위태할 때 적극적으로 행동한 진동(陳東)을 본받지 않은 것을 참으로 한스러워하며,
도리어 나라가 망할 때 자결한 윤곡(尹穀)을 따른 것을 정녕 슬퍼하네.
命抛鶴壽名千世(명포학수명천세), 詩鍊神工檀一時(시련신공단일시).
명(命)은 학수(鶴壽)를 포기했으나 이름을 천세에 남겼으며,
시(詩)는 신공(神工)으로 단련하여 한 시대의 으뜸이 되었네
權貴許多歸大罪(권귀허다귀대죄), 標標畢竟作宗師(표표필경작종사).
권세있는 벼슬아치는 많이들 큰 죄를 지었지만,
높은 기상 보이신 분은 마침내 큰 스승이 되었네.
※ 此柱聯詩句取擇於毅松漢詩集(차주련시구취택어의송한시집) 이 주련 시구는 의송 한시집에서 취택하였음.
절명시(絶命詩) - 매천(梅泉) 황현(黃玹)

亂離滾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난리를 겪다 보니 백발의 나이가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末然(기합연생각말연)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금일진성무가내)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 비추네

妖氣掩翳帝星移(요기엄예제성이)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임금 별자리 옮겨지니
九闕沈沈晝漏遲(구궐침침주루지)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도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부유) 이제부터는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임랑일지루천사)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올을 모두 적시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버렸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잔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曾無支廈半椽功(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나라를 지탱하는데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부시충) 단지 인을 이룰 뿐이요 충은 아닌 것이로다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끝맺음이 겨우 윤곡처럼 자결할 뿐이요
當時愧不躡陳東(당시괴불섭진동) 당시의 진동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함이 부끄럽다
梅泉頌(매천송) - 문병란
장원급제의 영광을 초야의 포의와 바꾸어 비단옷을 물리친 선비의 고고한 기상 부정부패를 도려내는 칼끝이여
지리산과 백운산에 두 발을 딛고 섬진강 맑은 물에 갓끈을 씻어 앉을 자리 설 자리 마지막 죽을 자리까지 스스로 양심의 불꽃이고저
섬 오랑캐의 침노 망국의 치욕 앞에 옷자락 여미어 衛正斥那(위정척나) 지조로 맞선 일편단심 목숨을 던져 강상의 도를 지키심이여
나라 찾은 지 60년 분열된 국론 앞에 아직도 눈물짓는 무궁화 강산 현해탄의 파도는 드높고
지금도 사위엔 어둠이 에워싸나니
님이여, 어디다 기념비를 세우리까 무릎 꿇고 빌고 비는 마음 잠들지 말라 절절히 꾸짖는 絶命詩(절명시) 사무친 그 말씀 귀 기울여 梅泉(매천) 위대한 두 글자 어디다 새기리까.
2010 9 매천 순국 100주년 주기 무등산인 서은 문병란 근송
매천역사공원
이곳은 광양이 남은 선비 매천 황현과 그의 선조와 묘역이다. 따뜻한 감성으로 수의 시를 남긴 탁월한 시인이었고, 자신의 시대를 기록한 위대한 역사가였으며, 망국의 시기에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문장과 역사와 절의가 일치하는 고결한 선비였다. 즉 매천은 무궁화 피는 조선에서 천년을 묶어도 자기 곡조를 간직하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살아도 자기 향기를 찾지 않은 매화처럼 지조를 지키는 선비가 되고자 하였다. 광양시에서는 이러한 매천의 선비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을 매천 역사공원으로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