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영 의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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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378-22
탐방로그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378-22 게이트볼장 입구 애향인의 땅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적비를 세우며
류공석전(건영) 선생의 의적과 공훈은 비문과 안내판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참조하시기 바라며 생략하옵고 일찌기 1990년에 곡성군에서 수립한 유적비의 위치가 벽지일 뿐 아니라 부지가 협소하고 와비마저 너무 왜소해 동향사림들이 봉기하여 이 비를 복원 확장 이전키 위해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협의하였으며 이에따라 곡성군과 순천보훈지청의 지원금과 후손들의 성금으로 이 비를 세우다.
2009. 11 애국지사 석전 류건영 선생 의적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안태기 근수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378-22 게이트볼장 입구 애향인의 땅
석전 류건영(石田 柳健永) 선생 유적
관리번호 : 55-1-7 / 관리자 : 류재환 / 위치 :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378-3
석전 류건영(石田 柳健永) 선생의 유적비는 1990년에 곡성군에서 선생의 항일운동에 대한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나 장소가 협소하고 와비(臥碑)마저 왜소(矮小)하여 2009년에 의적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본 의적비를 복원 확장 이전하였다. 선생은 1883년 4월 12일 이고장 오지리 당산마을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906년부터 두 선생의 휘하에서 항일 의병활동을 하였다. 중과부족으로 의병이 패배하고 최익현과 임병찬 등은 대마도로 압송되자 1914년 석전서당을 개벌하여 수많은 제자
를 배출하면서 삼엄한 감시하에서도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주입시켰다. 1939년 3월 16일자로 창씨개명 실시가 발표되자 조선총독부와 경학원과 중추원 방대 서한을 발송하고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 말할 수 없는 박해와 감시를 무릅쓰고 일제의 만행에 계속 항거하였으나 전국적으로 수배령이 내려지자 同生(동생)인 裁永(재영)과 浣永(완영)은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滿州)로 逃亡(도망)을 가버리고 선생은 그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우리민족은 망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1940년 7월 24일 음독 자결하였다. 해방 후 뜻있는 유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산사(武山祠)라는 사당을 세워 매년 제사를 모시다가 재정 형편상 중단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석전유고(石田遺稿) 1권이 있다.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愛國志士 石田 文化柳公 健永 義蹟碑(애국지사 석전 문화유공 건영 의적비)
오호라 자고로 국가가 망할 때마다 충신열사의 절의가 드러나 사승에 빛나고 특히 자국내의 혁명이 아니고 외침으로 인한 국난이 생기는 경우는 더욱 의사들의 격분이 심하여 애국충절의 충성심이 발휘되었으니 여기에서 천리민이가 민멸되지 않고 영구항존함을 알 수가 있다. 이 곳 곡성의 오지리에서 출생 성장한 문화류공 휘 건영 호 석전도 외침의 혼란기에 구국을 위해 진충수절하다가 자결순국한 분이었다. 공은 서기 1883년 4월 12일 이 고장 명문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면암 최익현과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사생취의하는 대의의 도를 배워 망해가는 조국을 건지고자 결심하였다. 이에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이끄는 의병진에 들어갔
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이 대패하고 면암과 임병찬 등은 대마도로 압송되고 의병진이 해산되자 향리로 돌아와 석전서당을 개설하여 청년 자제들에게 애국정신과 충절의식을 함양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서기 1918년에 광무황제가 붕어하자 8도의 인사가 통곡성복을 하였는데 흉흉한 금복설을 불구하고 종숙 춘당공 휘 원묵과 함께 옥후산에 올라가 거애성복을 하였고 서기 1939년에는 일제가 동성의 혼인을 허락하고 여서를 친자로 입계함을 허용하며 성씨를 개창한다고 발표하니 공은 분개함을 참지 못하여 당시의 소위 총독부와 경학원과 중추원의 삼소에 송신을 하여 힐책하기를 「사람이 금수와 다른 바는 인륜이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제도를 바꾼다면 이는 인간이 아니고 금수가 되는 것이니 령을 즉시 철회하라」하였다. 이는 아국의 전통문물을 파괴하고 왜이의 풍속과 동일하게 하려는 것이어서 국가의 폐망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공은 저들의 회개응답을 기다렸으나 오히려 이로 인하여 모진 박해가 더해지자 의분을 참을 수 없어 서기 1940년 7월 24일 거실에서 가인들을 내보내고 의관을 정제하여 단좌하고 방민에게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조용히 음독자결을 하고 말았으니 향년 58이었다. 사실이 알려지자 원근사람이 용근하여 사방에서 조곡을 하고 저들 도이도 와서 보고 감탄을 하며 돌아갔다. 천도는 무심치 아니하여 그로부터 5년 후에 마침내 왜노가 이 땅에서 철수하자 오향사림들이 공의 의열을 추모하기 위하여 무산사를 건립하고 매년 상향을 해오다가 재정난
으로 중도에 폐철되었다. 금년에 곡성군에서 전수한 와비가 너무 왜소하고 소략하여 동향 유지 제위가 의적비를 복원수립키로 합의되어 낭자에 종질 근창과 종친 향렬 양인이 포장하고 내방 청문하였다. 공은 국가에서 서기 1977년에 건국포상을 서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소 독립유공자 인물록에 기록되어 있고 곡성향교지에도 등재되어 있으며 유서로 석전유고 1권이 전세하고 있다. 오호라 공은 백세불후의 의적을 남긴 것이다.
서기 2009년 을축 중추
성주 이백순 근찬 해주 오명섭 근서